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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사' 대신 논쟁 택한 학자들
'주례사' 대신 논쟁 택한 학자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6.07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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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_ 한 출판사가 시도한 '격돌! 저자서평'

한 달여 전인 5월 9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사직공원 근처에 위치한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흥미로운 모임이 진행됐다. '식민지 근대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한 걸음'이라고 출판사가 말했을 때, 이것이 지칭하는 것은 허수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의 신작『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푸른역사, 2011.5)였다.

출판기념회야 출판사들이 공들인 책을 내놓을 때 으레 하기 마련이지만, 이날은 색다른 방식을 선보였다. '격돌! 저자서평'이라 이름 붙인 삼자대면 서평이 그것이다. 연구업적 강화, 논문 글쓰기 문화가 지배하는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전문 서평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시도된 '서평'이라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이날 '격돌'의 여운을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기록했다. "『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에 대해 학자들의 비판적 토론이 있었다. 책을 읽고 이 토론에 참가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논란이 없으면 학문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윤해동 선생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비판, 논란의 여운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는 어떤 책일까. 저자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책의 새로움은 식민지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있다. 책의 1부 '식민지 시대를 다시 읽는다'는 연구사 검토의 형식을 빌려 기존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허수 연구교수
허 교수는 기존의 '수탈론 및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며 등장한 최근의 '식민지 근대' 및 '민중사' 입장을 상호 교차하면서 검토하면서 자신의 '방법론'을 부각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서로 경합하는 다차원의 공공영역들'인데, "이는 '민족'이라는 단일 정체성, 혹은 여기에 '계급' 정체성을 추가할 뿐인 기존의 식민지 인식을 상대화하고, 공간이나 정체성 등의 측면에서 인식의 폭을 더 확장하려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수탈론 대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의를 제 1세대, '식민지 근대와 민중사'적인 논의를 제2세대로 임의적인 구분을 짓는다면 식민지 연구 제3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삼자대면' 서평에 참여한 신예는 서강대 사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정일영 씨다. 식민지 근대가 그의 연구 분야는 아니지만, 날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패기를 저자인 허 교수는 높이 샀다. 부비평자로 나선 이는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교수. 윤 교수 역시 식민지 근대와 관련 두드러진 방법론과 문제의식을 펼쳐오던 터라, '격돌 서평' 자리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 수밖에 없었다.

정일영 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비판하는 역사담론 구성을 ??위해??식민지 경험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자는 것은 한편으로 역사의식이 역사인식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지적하면서 '역사의식이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의심을 제기했다. 그는 또 "이 의미 있는 연구가 좀 더 현실감 있는 연구가 되려면, 다시 말해 저자의 역사의식이 불필요한 의심을 받지 않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見指忘月의 고사를 다시 한 번 되씹을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하면서 '하위 주체' 연구와 같은 구체적 방향도 언급했다.

윤해동 교수
윤 교수는 비판보다는 책의 의미를 밝히는 쪽을 자처했다. 특히 그는 허 교수가 시도한 방법론과 관련, "표상 연구와 개념사 연구라는 최신 연구 흐름을 수용해 자신의 관점 혹은 이론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는 전통적인 사상사 혹은 지성사 연구를 확실히 훌쩍 뛰어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윤 교수가 듣기 좋은 말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허 교수가 방법론적 차원에서 취한 균형 혹은 절충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균형 혹은 절충이 언제나 안고 있는 위험성을 이 연구가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하나. 해방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한 태도일 수도 있는 부분과 직결된 지점을 건드렸다. '독립 → 해방 → 주체'로 한국 역사학계의 식민지 경험을 포착하는 주안점이 이동해왔다는 저자와 역사학계의 시각을 문제삼으면서,  "이 연구가 추구하는 주체가 어떤 주체인지를 잘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연구가 탈식민적 지평에 놓인 그리하여 근대주체에 회의적인 그런 연구와 어떤 지평에서 융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언뜻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학계의 울타리가 좁다보니 그간 선후배들끼리 주고받는 '주례사 서평'이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 저런 사정 다 봐주는 비평 문화는 학문 폐색증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두들겨 맞을 때 제대로 흠씬 맞아야 맷집이 생기는 것처럼, 학문적 맷집을 서로 단련하는 과정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출판사측은 '격돌! 저자서평'을 앞으로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좀 더 강한 펀치를 주고받으면서 제대로 된 비평문화가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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