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 무협지 읽는 세대, 무협지 읽히는 시대
[흐름] : 무협지 읽는 세대, 무협지 읽히는 시대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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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2 16:41:09

“5갑자의 내공을 쌓아 만독불침지체로 다시 태어나니, 천마행공으로 검기상인에 이르도다.” (3백년의 수련으로 세상 어떠한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다. 천마가 하늘을 날듯 빠르게 날고 검이 상대의 몸에 닿지 않고도 검기로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다.) 앞의 문장에서 ‘갑자’나 ‘내공’ 정도를 알아들었다면 귀동냥이나마 들어본 이고, ‘만독불침지체’나 ‘검기상인’을 괄호 안 풀이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라면,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 이다. 21세기 한국문학은 가히 무협과 환상의 세상이다. 만화 대본소 한 귀퉁이에 숨어있던 무협지들은 이제 대형 서점 문학코너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학가 도서 대출 1순위를 차지하고 있고, 지하철 독서 풍경도 바꿔놓았다. 그들은 왜 무협소설을 읽나.


문학평론가 성민엽씨는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서 그 동안 논외로 쳐두었던 ‘무협소설’을 이야기하고 나섰다. 성씨는 “40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고정독자만 10만 명이 넘으며, 만화·영화·컴퓨터게임 등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협소설이 그에 합당한 학술적·비평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한 뒤,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의 장르로 진지한 문화연구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러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1990년대 ‘신무협’이라는 이름으로 진일보한 현재 무협소설이 ‘야유와 조소‘를 품고 있다고 진단한다. 권위와 규범, 기존의 질서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고, “중산층의 욕망 충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각성”과, 소외된 자와 하층민을 통해 삶의 실존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신무협은 기존의 무협소설들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평가다.


성 교수는 또한 1969년, 평론가 故 김현이 시도한 무협소설에 대한 문학적 접근을 소개하고 있다. 김현은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이라는 글에서 무협소설 현상을 “한국 중산층의 비개성적 허무주의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중산층은 자본주의의 발달로 점차 영세민화하며 자기 시대의 중추적 세력이라는 자각이 대 부르주아지에 대한 복종과 공포로 바뀌고, 개인의 무력함과 무의미성이 점차 모든 중산층을 파고든다”는 것. 그리하여 무협소설이 제공하는 도피와 대리 만족은 바로 중산층의 불안과 초조에 대해 환각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무협소설이 끊임없이 읽히는 사회 심리에는 다다를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욕망에 대한 야유와 조롱이 함께 하고 있다. 무협소설은 허위의식을 깨뜨리는 체제 전복의 가능성을 품은 채 기존 문학 양식에 스며들 수 있을 것인가.


성씨는 신무협이 “적극적인 자세와 긴장, 비판 및 자기 반성과 생의 의미를 모색하”는 속에서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범주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예외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로 무협소설의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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