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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사회, 지상에 척도가 있는가
얼굴 없는 사회, 지상에 척도가 있는가
  • 정은경 원광대 교수
  • 승인 2011.06.0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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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정은경 원광대 교수

정은경 원광대 교수
학과일을 맡으면서 가장 공들여하게 된 일은 ‘각종 공문’을 검토하는 것이다. 매일 수북이 쌓이는 공문 서류를 넘기면서 학과 게시물은 조교에게, 시일 내로 처리할 일은 책상 앞 메모판 위에, 알고 넘어가도 되는 일은 종이쓰레기함으로 분류하는 게 중요한 일과가 돼버렸다. 매일 거대한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서류를 분류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콘베어벨트 앞에 서서 쉴 새 없이 나사못을 조이고 있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의 처량한 모양새가 떠오른다.

 그 기다란 벨트에 서서 문득, 이 무수한 명령서는 어디로부터 기원하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때론 서류를 들고 그 내용의 적절성에 대해 혹은 철지난 서류의 ‘명령’의 유효성과 그 현재에 대해, 나와 다름없이 쉴새없이 죔새를 돌리고 있는 본부 직원이나 팀장에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은 대체로 더 큰 윗길의 상류를 가리키거나 그 원천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지난 ‘명령’의 폐기처분을, 그들의 ‘책임없음’을 묵묵히 시위하곤 한다.

 바야흐로 나는 관료사회의 한 복판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교수의 테크니컬한 ‘재량’은 있을 수 있지만 의견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의는 말할 것도 없다. 간혹 던지는 ‘의문’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은 ‘이미 서류를 다 나와 있어요’이고, ‘이미 서류에 다 나와 있어요’라는 행정편의는 개인의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친절하게도 일련의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서류를 더욱 두텁게 만들어가고 있다.

느닷없이 립씽크 금지 법제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가수의 립씽크를 법안으로 금지한다고. TV에서는 연일 LH 공사 경남 일괄 배치를 놓고 법적인 타당성을 묻고 헌법 소원을 한다고 야단이다. 작년 전남 지역의 전체 고소·고발 사건 중 사법처리가 필요하지 않은 사례가 3분의 2를 넘는다고 한다. 분쟁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법대로 하자’는 구호가 드센 걸 보면, 과거 무법천지였던 대한민국에 드디어 법치국가가 실현된 것이 아닌가라는 감흥이 없을 수 없으나. 그러나 법이 모든 분쟁을 해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만능통치약이 될 수 없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현실을 아무리 문자로 규정하고 규범과 윤리를 성문화하려고 해도, 무한한 현실 앞에서 법이란 언제나 과유불급인 것. 부부 싸움과 개인의 소소한 이권분쟁과 국가 행정과 권력의 문제까지 줄줄이 싸들고 법정 앞에 선다한들 판사가 최고의 지혜를 내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 만능주의’와 ‘법질서회복’이란 역설적으로 상실된 공동체적 삶의 가치와 소통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도발적인 선언 이후, 그리고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마을 공동체 파괴 이후
인간은 ‘절대 가치’의 척도를 잃어버렸다. 신의 부정은 곧 휴머니즘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신이라는 절대 가치를 상실해버린 현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증명하는 절대적 외부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인간은 왜 동물이나 광물보다 더 존엄하고 행복해야 하는가. 왜 개인의 자유가 민족과 국가의 이익에 복속돼야 하는가. 왜 획일적이고 효율적인 전체주의보다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민주주의이어야 하는가. 절대적 가치의 허무주의 앞에서 인간은 ‘법’이라는 새로운 ‘신’을 모시고 글자를 헤집고 있다.

그러나 ‘신’이 그러하듯 ‘국가의 법’이란 인간의 절대적 외부에 지나지 않다. 우리의 많은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혜안과 지상의 척도는 절대적 외부에 있지 않고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있으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너’와의 관계 속에 있다.

마틴 부버는 무수한 파편으로 찢기고 찢긴 이 ‘깨어진 세계’-기계화, 비인간화, 수평화, 아톰화된 이 세계-자기를 상실하고, 자신이 만든 사회에서 노예로 전락한 이 현대사회의 위기의 핵심이 ‘나-그것’에 매몰된 개인들에 있다고 진단했다. 부버의 ‘그것’이란 법, 서류와 같은 비인격적인 사물들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의 비인간화와 가치 부재는 이렇듯 ‘나-그것’으로 환원하여 이기적 개인이 타인과 삶의 세계를 수단화한 물화에 있다는 것이다. 부버에 따르면, 이 얼굴없는 집단 사회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나-너’의 근원어에 바탕을 둔 인격 공동체의 회복에 있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나’의 독백이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이다”라는 관계와 소통의 회복이 절실한 때이다.

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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