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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바람 속의 사색
[문화비평] 바람 속의 사색
  • 배병삼 성심외대
  • 승인 2000.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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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르는 ‘希望’의 리얼리즘
바람이 차다. 산등성이를 오르는 걸음을 바람이 가로막는다. 아마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걷는 것이고, 걷는 것은 또 이렇게 바람을 가르는 것이리라. 하긴 바람이 뒤에서 불어와 등을 밀어주면 그건 반칙이다(옛날 멕시코 올림픽에서 100미터 육상 신기록이 등뒤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취소되었다). 그렇다. 내 걸음을 가로막는 것만이 바람이고,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것만이 삶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잊지 말 일이다. ‘발을 내딛는 것’[進步]은 바람을 가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러하다면 묵묵히 걸어갈 일이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벙끗 바람을 탓하기라도 할 양이면 바로 그 때, 삶은 ‘어리광’으로 추락한다. 바람이 없기를 바라고, 바람이 등뒤에서 밀어주기를 바라는 삶은 진짜 삶이 아니며, 또 그런 進步는 진짜 진보가 아니다. 바람을 맞서지 않고 고개를 뒤로 돌려 바람을 탓하거나, 삶을 살아내지 않고 삶을 누리려고 들어서는 제대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다. 발이 아파야지 목이 쉬어서는 안될 일이니, 이발소 액자에 늘 걸려있던 푸쉬킨의 시구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지어다.” 새 천년 타령이 어제 같더니, 이러구러 벌써 열두 달을 걸어왔다. 세월도 바람이다. 공자가 흐르는 물을 보고 “흘러가는 것이 저럴진저”라고 탄식한 것은, 실은 세월이 바람임을 어느 순간 깨우치고 툭 외친 偈頌이다.

돌이켜보면 지난봄엔, 꽃샘바람과 함께 선거바람이 불었다. 그 사이 돈바람도 불었고, 학연-지연의 바람도 불었다. 무엇보다 백미는 총선 사흘 전에 발표된, 이른바 ‘북쪽바람’[北風]이었다. 張三李四들은 이 바람이 여당의 등을 밀어주리라 두루 예견하였지만, 북풍의 효과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았으나, 선거 날의 날씨가 워낙 좋아 투표는 않고 다들 놀러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시니컬한 분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소풍’이 ‘북풍’을 눌렀다는 것.

여름에 접어들면서 눈물바람이 불었다. 50년의 끊어진 인연이 단박에 이어지는 장면들 앞에 다들 목메고 또 울었다. “자전거 찾으러 간다더니, 자전거는 찾았냐?” 그 한마디에 끊어졌던 50년 세월이 금방 이어졌다. 한끼라도 손수 만든 밥을 먹이고 싶어했고, 손수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싶어했고, 하룻밤이라도 같이 자고 싶어했다. 사람이 ‘意識의 덩어리’이기에 앞서, ‘衣食의 덩어리’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렇기에 지난여름 눈물바람은 사람과 삶, 그리고 ‘살’과 ‘살림’이 두루 동일 계열의 단어임을 추론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살’이 사람의 기본소자인 ‘몸뚱이’를 뜻한다면, ‘살림’은 사람을 살리고, 또 삶을 꾸리는 것이다. 그러니 살은 사람의 바탕이요, 살림은 삶의 바탕이다. 그런데 여태 남북한의 삶은 기껏 ‘살’을 만지고, 부비고, 먹이는 원초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림’을 꾸리고, 또 옳게 살리는 일이 남았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찬바람이 앞당겨 불었다. 구조조정이라는 ‘낯익은’ 칼바람이다. 그 칼바람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어둑한 지하도 한켠에서 칼잠을 잔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방송을 타고 흐르는, 실직한 남편을 다독이는 아내의 편지에 승객들이 온통 코맹맹이가 되었다. 칼바람이 눈물바람을 불러온 것이다.
헌데, 칼바람과 눈물바람의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분노다. 우리들의 경망에 대한 분노이고, 망각에 대한 분노이며, 휘둘림에 대한 분노이다.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1달러만 낮아도 몽땅 후진국 취급하며, 마치 식민지를 둔 제국의 臣民인양 거드름을 피우던 우리는, 이제 석유 1달러의 변동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백성이 되었다.
여태 입으로는 근대를 논하고 눈으로는 ‘탈근대’를 지향한다 했지만, 실제 우리 몸은 자동차, 핸드폰, 신용카드의 욕망에 휘둘리고, 급기야 석유값에 휘둘리는 ‘전근대’를 살았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삶이 自立하지 못한 처지라면, 그것이 그 어디 근대일까).

그러나 歲暮를 앞둔 이 겨울, 너무 모질게 자책하지는 말자.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그늘이 짙으면 볕이 바른 법. 바람은 또 ‘바람’[希望]이기도 한 것이다. 정작 바람은 차가운 현실[風]이면서 또 꿈이요, 기원인 바였다. 내년에는 불어오는 바람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자아낸 바람[希望]을 실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자. 내 삶을 내가 설계하고, 남이 꼬드기는 욕망이 내 욕망인양 휘둘리지 않는 삶이 되기를 바라자.

허나 또한 잊지 말일이다. 바람을 뜻하는 한자어 ‘希’자는 희망이면서 또 ‘드물다’는 뜻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애초에 바람이란 쉬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또 실현이 드물기에 희망으로 매양 남는다는 리얼리즘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또 어찌하랴! 삶이란 걷는 것이고 등뒤에서 부는 바람은 반칙이라면, 바람을 가르며 나아갈 수밖에. ‘희박한’ ‘희망을’ ‘바라면서.’

baebs@sungs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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