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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그 페미니즘’ 논쟁, 여성판 사상검증인가 발전적 비판인가
[이슈] : ‘그 페미니즘’ 논쟁, 여성판 사상검증인가 발전적 비판인가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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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2 16:37:27
전방위적인 토론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이후를 돌아보면, 논쟁의 가운데에 언제나 여성이 있었다. ‘군 가산점 위헌 논란’, ‘사후 피임약 논쟁’, ‘모성보호법 제정 논란’ 등 굵직굵직한 사회쟁점들은 여/남 대결로 슬그머니 뭉뚱그려지곤 했다. 생래적으로 여성보다 ‘말을 다루는 지능’이 떨어지는 데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이 생존권을 위협할지 모른다고 지레 겁먹어 거친 논리와 욕설로 토론판을 분탕치던 남성들이 택한 자구책은,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사이버 마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술은 온·오프 라인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논리’나 ‘말’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게릴라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가부장 좌파’와 ‘부르주아’의 싸움?

한 영화잡지에서 시작된 ‘2002년 판 페미니즘 논쟁’은, 그 동안의 치졸한 게릴라전과는 다르다. 훈련을 통해 그만큼 토론문화가 세련되기도 했고, 논쟁하는 당사자들이 수많은 팬을 거느린 인기 논객인 까닭이기도 하다. 확고한 논리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하며, 적당한 이해까지 갖춘 이들의 논쟁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데, 논쟁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의문 하나. 왜 여성은 종종 사상검증의 대상이 되는가. 남성들이 철학과 정치, 사회학의 담론을 일구는 거국적인 자리에 ‘초대돼’ 당당한 언어로 이야기할 때, 여성들은 ‘왜 다른 계급을 돌보지 않는가’ 혹은, ‘왜 부르주아적 근성을 버리지 않는가’라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돼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른바 ‘그 페미니즘 논쟁’을 불붙인 이는 스스로에게 ‘B급 좌파’라는 이름을 붙인 출판인 김규항 씨이다. 그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해오던 영화 주간지 ‘씨네 21’ 349호(2002년 4월 23일자)에 ‘그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페미니스트들에겐 유감스런 얘기겠지만,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주류 페미니즘(정확하게, 9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한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내내 ‘주류 페미니즘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스스로를 ‘노력하는 마초’로 규정한 김규항 씨가 ‘그 페미니즘(주류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유는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 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고,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평등’의 이념을 자양분으로 자라온 페미니즘에게 ‘사회적 억압에 무관심하다’는 비난보다 더한 치욕은 없을 터.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페미니즘’ 무리들, 즉 김규항 씨가 마땅치 않아 하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은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이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증오해마지않는 남근주의를 넘어서기는커녕 흉내내며 심지어 투항한다(이를테면, 한 도발 전문 페미니스트는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을 대통령으로 밀자고 주장한다).” 김규항씨 글의 ‘소재’가 된 것은 바로 ‘박근혜를 지지하자’는 주장으로 거센 찬반논란을 불러일으킨 최보은(영화잡지 ‘프리미어’ 편집장)씨이다. 김규항이 지적한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은 박근혜, 증오해마지않는 남근주의에 투항한 페미니스트는 최보은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와 여성학의 세례를 받아온 ‘중산층 엘리트 여성’에 대한 분명한 적개심, 그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이에 대해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이는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여성학)이다. 그는 ‘여성신문’ 675호(2002년 5월 10일자)에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용기’를 어디서 얻었을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노력하지 않는 마초’ 김규항은 더 이상 여성주의를 모욕하지 말라”고 비판한다. 이 글에서 조교수의 비판은 글을 쓴 김규항씨 뿐 아니라 “여성주의의 현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이 글을 실어준” ‘씨네 21’과, ‘여성주의를 잘못 이해한’ 최보은씨에게도 향해 있다.
그가 비판하는 김규항씨 글의 맹점은 ‘지식인으로서 최소한도의 성실성’도 갖추지 못했다는 데 있다. “주변의 여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여성주의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지식인으로서 최소한도의 성실성만 있다면 수 있다”는 것.
또한 조 교수는 ‘모든 여성이 태생적 소수자’이며 ‘박근혜 씨도 그러할 것’이라는 최보은씨의 주장도 전면 비판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소수자로서의 의식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거부하는 환경과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에서 힘겹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마지막으로 “최보은씨는 여성들을 위해 대선 후보자로서의 박근혜의 존재 의미를 ‘사유’할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여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왜 그의 주장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김규항씨와 같은 ‘노력하지 않는 마초’들에게 페미니즘을 모욕할 빌미를 주게 되었는지를”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김규항씨는 같은 잡지 352호(2002년 5월 15일자)에 ‘그놈들과 그년들’이라는, ‘잡지 사상 유례없는 과격한 제목’에서 본의 아니게 촉발된 논쟁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내보였다. “좌파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부르주아’라 밥맛 없어하고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좌파 남성들을 ‘가부장 좌파’라 밥맛 없어”하지만, “모든 좌파 남성이 ‘가부장 좌파’거나 모든 페미니스트 여성이 ‘부르주아’는 아니”다. 따라서 솎아내야 할 쭉정이들은 ‘그놈들(좌파 속에 숨은 가부장 좌파들)’과 ‘그년들(페미니스트들 속에 숨은 부르주아들)’이라는 것이다.

남성 지식인들, 오만한 계몽성을 버려라

그는 “여전히 ‘90년대 이후 한국 주류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대체할 말을 알지 못한다”고 맞선다. 자신이 명명한 “‘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9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에 나타난 모종의 강력하고 전반적인 경향을 말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불을 지르는 단락이 이어지는데, “90년대 이후 일군의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에 의해 수입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맹랑한 강령에, (한국식 한풀이에서 마초 흉내에 이르는) 이런저런 통속적 정서들을 결합한 그런 것이다.”이 대목은 막바로 반론의 대상이 된다. 최보은씨는 ‘씨네 21’의 반론에서 “김규항은 내가 쓴 여성주의적 글들을 탈탈 털어서, ‘여성해방을 인간해방과 별개로 진행한다’는 강령을 내세운 ‘급진적’인 주장이 무엇인지 제시해주기 바란다”는 말로, 본격적인 대거리를 시작하고 있다.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여성주의 웹진 ‘언니네’에 실린 “‘덜 떨어진’ 맑시스트와 ‘제대로 안 떨어진’ 맑시스트의 차이?”라는 글에서 김규항씨를 비판하고 있다. “낮잠에서 몸을 일으켜 웬만큼 큰 서점에 들어가 소위 ‘여성학’이라 이름 붙여진 서가들 앞에 선다면,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 뿐만 아니라 ‘하층계급 인텔리·노동자 여성들’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해체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구체적이고 면밀한 현장검증과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과 젠더의 문제를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탁상머리의 비판을 ‘비판’한다.
그리고 김규항씨에게 묻는다. “‘성적 억압의 좀더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에 대해 남성 진보 지식인이 페미니즘을 ‘살면서 고민하는’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은 연민을 가지고, 더 굳건한 연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그것은 ‘맹목적인 오만’이라고 주장한다.
김규항 씨는 아군 없이 외롭게 ‘싸우고’ 있다. ‘강단 페미니스트’들 대다수가 침묵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일까, 맞는 말이기 때문일까. 피곤한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더 치열하게, 더 무섭게 논쟁이 불붙기를 바란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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