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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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언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 승인 2011.05.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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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이기언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이기언 연세대 교수
문학이 여타 학문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자기이해의 길을 열어주는 소중한 보고라는 점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다른 학문들이 몸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학이라면, 문학은 마음(정신)의 삶을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학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세계가 존재하고, 작가가 말한다. 이것이 문학이다.” 세계가, 인간의 삶이, 인류의 역사와 전통이, 인간사의 모든 것이, 게다가 신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문학 안에 들어 있다. 문학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한다.

단테와 세르반테스, 라신과 셰익스피어, 괴테와 카프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브스키, 랭보와 보들레르, 지드와 카뮈, 이상과 최인훈이 없었다면, 사랑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정의와 자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얼마나 깨우쳤을까.

  문학은 언어 예술이다. 언어가 문학의 심이자 문학의 힘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나와 세계를 표현하게 해주고, 나와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이해존재론에 따른다면,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게 이해는 존재양식 그 자체이고, 존재에 대한 이해는 늘 세계에 대한 이해인데, 이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실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토대가 언어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으로서의 이해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처럼 자기자신』의 저자인 폴 리쾨르의 자기해석학을 빌려 대답하자면, “자기인식” 또는 “자기이해”이다. 문제는 ‘어떻게’에 있다. 어떻게 자기를 이해하는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칸트의 코기토를 “무너진 코기토” 또는 “상처받은 코기토”로 규정하는, 다시 말해서 코기토의 자기정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리쾨르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직접적인 자기인식이란 없고, 모든 자기인식은 간접적인 인식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자기이해는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 이해를 통한 에두르기의 산물이라는 것이 리쾨르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타자를 통한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스스로 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혹은 그게 나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나는 실제로는 나가 아니라 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의 허상을 좇지 않고, 실상의 나를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거울에 비친 나가 있어야, 그 나를 보면서 나라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나(moi)를 버려야 자기(soi)를 만난다.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른 눈으로, 남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때에야, 나가 아닌 “나와 다른 자기(un soi autre que le moi)”가 마침내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독서의 산물이자 텍스트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나와 다른 자기’는 결코 완성형이 아니다.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일 수 없듯이, 이 ‘자기’는 끊임없이 다른 나, 끊임없이 달라지는 나의 어느 순간의 나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름이 나의 자기정체성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신과 인간이 다른 점이고,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 끈질기게 다른 나를 찾는다는 것, 같은 길을 수도 없이 왕복하면서도 또 다른 자기를 만나려는 모진 노력을 한다는 것. 코나투스(Conatus). 인간에게 주어진 시지프의 아름다운 고행이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작가가 저마다 인간과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말하기에 문학이 존재한다. 바벨탑이 완성되었더라면, 문학의 존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르게 말하기에,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학은 수학이나 경제학이 아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언어로 다른 답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기에 문학은 결코 독단적 사고를 허하지 않는다. 문학인이 독재자의 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석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라고 했다. 이 명구에 대한 가다머 자신의 해석을 따르자면, 드러내면서 감추는 게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는 결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고, 단지 존재가 드러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 언어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무한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 지평 또한 무한일 수밖에 없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나선형 악순환이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열려 있는 이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이해한다는 것은 늘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문학인으로서의 필자에게 문학을 대하는 겸허한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늘 ‘다른 눈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Allo eidos gnoseos.

이기언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필자는 파리 소르본느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카뮈, 블랑쇼, 해석학, 20세기 프랑스 지성인사를 연구했고, 저서로 『문학과 비평 다른 눈으로』, 역서로 『지식인의 죄와 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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