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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유수철의 비판에 답변함
[재반론] 유수철의 비판에 답변함
  • 강신주 연세대
  • 승인 2002.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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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2 16:25:46
강신주 (연세대 강사·철학)

교수신문에서는 지난 229호에 ‘강신주 강사의 ‘도올비판’을 비판한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225호에 실린 강신주 연세대 강사의 글에 대해 유수철씨가 보내온 반론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하는 유수철씨의 반론에 대한 답변입니다.

꼼꼼히 제 글을 읽어주신 유수철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전 글에서 김용옥의 기철학체계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점을 지적했었습니다. 첫째는 그가 모색하는 기철학에 내에는 ‘시간’과 ‘기’라는 두 가지 이중적 범주가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의 기철학은 결코 ‘우리’의 이론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님께서는 저의 두 가지 지적 모두를 저의 지적인 불성실에 기인하는 논거 없는 비약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우선 첫째 기철학의 체계내적 정합성 문제에 대해 말하도록 하죠. 우선 님께서는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해결하고자 한다’는 말이 ‘시간이 최종적 범주이다’라는 말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을 시간 속에 해결하고자 한다는 김용옥의 말이 참이라면, 그가 해결한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의 진리’, 혹은 완성된 기철학체계는 시간 범주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만약 김용옥이 자신이 설정한 기철학의 과제를 완수한다면, 그의 최종 범주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철학이라는 말로 암시되는 ‘氣’는 ‘우주와 인간의 모든 것’입니까, 아니면 ‘시간’입니. 저는 이렇게 되물어 본 것입니다. 전자라면 ‘氣’는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하부 범주에 떨어지게 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시간=氣’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겠죠. 그러나 김용옥은 시간을 氣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過不及의 氣의 상태 속에서 시간이 존립한다’고 말했을 때의 의미이지요. 따라서 저는 김용옥의 기철학의 ‘과제’는 체계 내적으로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氣는 시간을 규정하지 그 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다른 모든 것을 시간 속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氣만은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화이트헤드의 핵심 개념은 님의 지적처럼 ‘현실적 계기’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적 계기’는 氣로 전유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합생(concresence)’ 혹은 ‘연접적 통합’을 통해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이념적 혹은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이론-가설적’ 실체이기 때문이죠. 그에게 있어 ‘현실적 계기’의 ‘합생’ 과정이 ‘생성’이라는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김용옥처럼 시간을 통해 ‘현실적 계기’를 규정한다기보다는 현실적 계기의 ‘합생’ 운동을 통해서 시간을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있어 ‘현실적 계기’가 최고 범주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화이트헤드는 시간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철학체계는 김용옥의 기철학체계와는 달리 체계 내적인 정합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의 기철학은 ‘우리’의 것일 수 없다는 저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님께서 비판하신 ‘동방인=한자문명권’은 김용옥 본인이 ‘기철학산조’에서 한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저의 억측과 비약만은 아닙니다. 원래 저의 글에서 김용옥의 이야기는 모두 쪽수까지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측에서 글의 성격상 그 쪽수를 모두 삭제했다고 하더군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님께서는 제가 무근거한 억측과 비약을 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쉽기만 합니다. 어쨌든 님께서는 김용옥 철학의 위상을 아주 높게 평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님의 평가가 타당한지를 검토해볼 수가 없군요. 여기서는 단지 이전 글에는 실리지 않았던 김용옥의 현실인식에 대한 저의 입장을 간단히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근대성은 자본-민족-국가라는 삼위일체의 대두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근대성은 민족-국가의 대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핵심이라고 저는 봅니다. 페리 앤더슨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결국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이해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었을 때에만 적합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김용옥은 자신의 글인 ‘기철학산조’, ‘노자와 21세기’ 도처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연이라고, 나아가 그것은 인간이 有欲의 존재라는 데서 필연적으로 귀결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을 때, 이런 그의 판단은 자신이 정치경제학적, 혹은 사회경제사적인 통찰에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로서 발생한 자본주의를 인류 역사의 자연성으로 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오류도 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김용옥의 이런 무지와 오류가 메타적인 철학작업으로 오해돼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는 이미 ‘노자와 21세기’에서 IMF 구제금융 사태를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다수 민중들이 ‘有欲’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대다수 민중들이 해고당해서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은 그들의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민중의 고통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자본 운동이 낳는 구조적 문제를 각 개체의 내면의 문제, 즉 無欲이냐 有欲이냐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그의 사유에서는 자본주의와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 속성이라는 문제가 애초에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을 때 이 문제를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의식조차도 불행하게 바로 이 제국주의에 의해 수동적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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