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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객, 이슈들 곱씹을 기회 놓쳤다
한국 관객, 이슈들 곱씹을 기회 놓쳤다
  • 백승찬 경향신문 기자
  • 승인 2011.05.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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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무엇을 남겼나

장 뤽 고다르 감독의「필름 소셜리즘」. 디지털 특유의 얄팍함을 드러냈다.
12회 전주국제영화제가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9일간에 걸쳐 펼쳐졌다. 한국의 국제영화제 중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이 영화제는 기존 영화들의 관습에 어긋나는 대안적인 미학을 선보이는 영화들을 소개하는데 강점을 보여왔다. 초기 전주영화제는 당시로선 미학적, 산업적 측면에서 새로운 경향을 이끌던 디지털 영화를 선구적으로 알렸다. 디지털 영화가 보편화된 최근에는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 대중을 당황케 할 수도 있는 영화들을 상영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올해도 이 같은 경향의 작품들이 대거 소개됐다. 전주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국제경쟁 부문에 선정된 한국영화 「미국의 바람과 불」은 뉴스릴을 편집, 재가공하는 방식의 작업을 해왔던 김경만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다. 대한뉴스, 관광객 유치용 문화영화 등 방대한 양의 정부 홍보물을 목적에 맞게 리서치한 뒤, 이미지와 사운드를 어긋나게 하거나 장면과 장면을 충돌시킴으로써 이 영상물들이 얼마나 허황하며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늘을 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 뒤에 미군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붙인다든지, 미군이 평범한 한국 가정에 초대받아 즐겁게 식사를 하는 그러나 연출된 것이 분명한 장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영화에는 내레이션이나 자막 등 감독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들이 일절 없지만, 118분의 다큐멘터리는 결국 한국이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에 얼마나 오랜 시간 종속돼 있었는지 드러낸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지는 것은 현대 영화 최전선의 한 경향이다. 픽션은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된 장면을 삽입하고, 다큐멘터리는 연출의 흔적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한국 장편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박찬경 감독의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형 박찬욱 감독과 함께 아이폰으로 찍은 단편 「파란만장」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그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에서 88 올림픽을 앞두고 화재로 사망한 안양 지역 여공들의 흔적을 되짚는다. 박찬경 감독 자신이 ‘감독’ 역으로 등장하고, 화재 혹은 수재로 죽어나간 민중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굿 장면에선 감독이 오랜 시간 탐구했던 무속에 대한 관심사가 다시 나타난다.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실제 인물과 이 인물의 재연 배우가 번갈아 출연하는 건 다큐와 픽션의 엄격한 경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던지는 짓궂은 농담이다.

해외 영화 중에서도 눈여겨볼만한 다큐멘터리가 많았다. 극장 개봉을 앞둔 「인사이드 잡」은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작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역은 물론, 조지 소로스, 누리엘 루비니 등 저명 인사들을 인터뷰해 만든 이 영화는 “미국은 이제 학계가 아니라 할리우드가 지킨다”는 말을 확인시킨다는 평을 들었다. 배우 맷 데이먼이 내레이션을 맡았다는 점에서는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자유주의적 취향이 드러나기도 했다.

저명한 영화평론가 노엘 버치가 앨런 세쿨라와 함께 만든 「잊혀진 공간」은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지적인 다큐멘터리였다. 클릭 한 번으로 지구 반대편의 물건을 손에 쥘 수 있는 시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줄곧 물류의 중심이었던 바다는 ‘잊혀진 공간’이 됐다. 새로운 역, 항구가 생겨 몰락해가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마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비정규직 트럭 운전사들, 홍콩의 해양학교, 한국 선장이 있는 컨테이너선 내부, 중군 선전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물류 시스템으로 본 자본주의 흥망사’를 증언한다.

간단한 트릭으로 국가와 자본의 공생 야유한 고다르

영화사에 남는 명장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누벨 바그의 기수이자 영원한 현역인 장 뤽 고다르의 신작 「필름 소셜리즘」이 전주에서 공개됐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돼 영미권 평론가들의 투덜거림, 프랑스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의 영어 자막은 전체 대사가 아니라 몇 가지 명사와 기괴하게 배치된 전치사 등으로만 부분적으로 번역됐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올해로 만 80세가 된 고다르만이 안다. 자본주의 세계의 축소판같은 지중해의 호화 유람선, 부모를 불러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어린 남매, 이집트, 팔레스타인, 오데사 등에 대한 코멘트가 이어진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 가수 패티 스미스가 등장하고 영화사의 고전인 「전함 포템킨」이 인용된다.

디지털 영화의 최종 목적이 얼마나 필름처럼 보이는지에 달려있다고 모두들 믿고 있는 와중에, 고다르는 디지털 특유의 얄팍하고 과장된 색채, 버퍼링, 잡음을 노출시킨다. 통상 영화가 끝나면 나오는 스태프 이름을 도입부에 붙이고, 종결부에는 해외 DVD에서 볼 수 있는 미연방수사국(FBI)의 경고를 내보낸다. “이 저작물의 무허가 복제·배포는 불법입니다.” “지적 재산권은 없다. 지적 의무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왔던 고다르는 간단한 트릭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공생을 지적한다.

과작의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토리노의 말」역시 반드시 언급해야겠다. 끊임없이 폭풍이 몰아치는 황무지의 한 오두막에 거주하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말의 반복되는 일상을 146분동안 집요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니체의 세계관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뒤섞은 듯한 압도적인 감상을 안겨준다.  

전주영화제는 여건상 한국 개봉이 어려운 해외 작품들의 판권을 구매해 개봉을 추진해왔다. 지금까지 「바흐 이전의 침묵」, 「울트라 미라클 러브 스토리」가 이 방식을 통해 개봉했다. 영화팬들에게는 다행히도 「필름 소셜리즘」과 「토리노의 말」 역시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특히 「필름 소셜리즘」은 그 난해함에 놀란 수입사가 한 차례 구매 의사를 철회한터라 더욱 의미가 있다.

개막작 선정된 이란 영화 관계자들 대거 불참

언제나처럼 지적이고 혁신적인 프로그래밍이 돋보인 올해의 전주였지만, 더 많은 관객의 눈길을 붙잡을법한 게스트 초청이 부실했다는 점은 여전히 숙제다. 특히 올해는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 별거」의 배우, 감독 등이 전주를 찾지 않았다.

전주영화제 측은 “영화가 뛰어나 개막작으로 선정했지만, 감독이 베를린 수상 이후 워낙 바빠져 일정 조율에 실패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전주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개막작 관계자가 개막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점으로 남을 만하다. 특히 이 영화와 영화관계자들에게는 언론과 관객이 궁금해할 만한 많은 이슈가 있었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 남녀주연상을 모두 가져간 데다가,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반체제 활동’을 이유로 6년의 징역형에 평생 활동 금지 선고를 받은 상태이며, 이후 아랍권의 민주화 바람까지 불었다. 한국 관객들이 이 많은 이슈들을 곱씹을 기회가 날아갔다는 점은 올해 전주에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이다.

백승찬 경향신문 기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2003년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현재 엔터테인먼트부에서 영화 및 클래식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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