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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한국학
슬픈 한국학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5.02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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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최익현 편집국장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은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으로 개원했다가 2005년 2월, 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에 그치지 않는다.

알려져 있듯, '정문연'은 박정희 정권과 밀접한 태생적 관련성이 있다. 한 나라의 정신문화를 연구하고 이를 밝힌다는 좋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정문연'은 경기도 성남에 고립된 섬처럼 있어야 했다. 교수들도 자주 불려가 그곳에서 의식 교육을 주입받았다. 그것은 분명 전통과 미래를 잇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지적 탐색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이 있었던 것처럼, 정문연은 '官邊'의 흉물스러운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란 이름을 갖게 됐을 때 비로소 제자리가 마련됐다. 세계화라는 조류 속에서 추상적인 '정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현태인 '한국학'이란 학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으로 전환했기에 학계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걸맞은 이름을 갖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중연이 명실상부한 독립성을 확보했다고는 볼 수 없다. 首長인 연구원장은 언제나 외부에서 입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중연은 정부산하기관이므로 정부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다. 가깝게는 한상진 서울대 교수(사회학), 이상주 교육부 장관(교육학), 장을병 성균관대 총장(정치학), 김정배 고려대 총장(사학) 등이 이 자리를 거쳐 갔다. 한중연 내부에 '한국학'에 정통한 교수가 전혀 없다면 몰라도 이러한 연이은 외부 인사 낙점은 적절치 않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었다. 

지난 달 21일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69)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15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임기 3년의 자리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대 교수와 울산대 총장을 거쳐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제2대 대통령실장을 지낸 인물이다.

한중연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정 신임 원장은 취임하던 날 첫 출근에서 세계와 함께 하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열정을 쏟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얼마 전까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필'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의 취임으로 한중연이 과거 '정문연'처럼 정신교육을 강조하는 逆進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학은 우리의 혼과 얼, 전통과 역사가 용광로처럼 들끓는 분야다. 그가 아니면 한중연이 세계 속으로 나아가기에 어떤 한계가 있었던 걸까. 신임 원장은 한국학 저변을 확장할 수 있는 그만의 어떤 독특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단 말일까. 아무리 봐도 이 역시 '청와대發 보은 인사'로만 보인다. 한국학 프로그램을 잘 다듬고 이를 특화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오해 없이 한중연이 독자적인 자기 방식으로 독립성을 지닌 기관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외부 인사도 모자라서 이제는 대통령실장까지 챙겨드려야 할 정도로 한중연 수장의 역할과 책임이 凋落했다면, 한국학은 여전히 슬플 수밖에 없다.

최익현 편집국장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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