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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질문도 불경스럽지 않다
어떠한 질문도 불경스럽지 않다
  • 김수용 연세대 명예교수ㆍ독일문학사
  • 승인 2011.05.0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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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물어보는 용기와 학자의 자세

김수용 연세대 명예교수·독일문학사
1970년대 초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을 타고 꼬박 하루를 날아 도착한 독일은 그저 거리상으로만 먼 나라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질서 있는 거리 풍경, 울창한 숲과 잔디밭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공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요로운 그들의 삶의 모습은 헐벗고 가난하고 암울한 내 나라의 현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어서 나는 저절로 위축되고 주눅이 들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 한국 대학의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지 못한 나에게 독일 대학에서의 수학은 어렵기만 했다. 내 학문적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언어적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다. 읽고 쓰는 거야 그런대로 해 나갈 수 있었지만 말하고 듣는 것이 시원치 않으니 강의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더욱이 제대로 된 토론 훈련을 거치지 못한 나에게 세미나에서 이뤄지는 지도 교수와 학생들 간의 활발하고 격의 없는 토론은 부럽고 놀라운 것이기만 했다. 때로는 무언가 질문을 해 보고 싶어도 내 질문이 유치하거나 엉뚱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내 입을 가로막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는 큰 용기를 내 손을 들고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나 예의 그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혹 제 질문이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조심스런 모두발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교수가 돌연 내 말을 끊더니 “헤르(미스터) 김, 이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답은 있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질문이란 없습니다, 어떠한 질문도 어리석지 않아요”라고 정색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눈이 확 뜨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의문이야말로 모든 새로운 것의 출발점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도 근본적으로는 ‘물음’에서 시작됐고, 서구와 세계의 현대화를 시작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도 중세의 봉건주의와 신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의문’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내 실질적인 ‘유학’은 그 때의 질문 사건에서 시작됐다. 이때부터 조금씩 내 나름대로 묻고 생각하는 데 자신감을 찾아갔고, 조금씩 독일 대학에서의 공부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연세대 교수가 된 후 나는 학기 초 강의가 시작될 무렵 늘 이 에피소드를 학생들에게 말해줬다. 학생들에게 무엇이든 물어보고 같이 토론해 보자고 격려하면서.

‘왜 저렇지 않고 이러할까?’, ‘이렇지 않을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지금 이러한 것은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 등등의 의문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의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의문은 모든 비판적 사고의 근원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세계는 변화해 왔고 학문은 발전해 왔다. 학자들이 어떤 이론체계나 세계 해석에 안주하면, 그래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고 이것들을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이면 학문은 정체되고 굳어지며, 썩어갈 것이다.

칸트와 헤겔의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아무리 철학적으로 ‘위대하다’할 지라도, 이 철학의 이론과 체계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면 세계의 철학은 칸트와 헤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저명한 괴테 연구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그의 『파우스트』 해석에 대해 아무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세계의 『파우스트』 연구는 이 학자의 해석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모든 괴테 연구자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리 인정받고 권위 있고 존경받는 학자라 할지라도 그의 학설에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의 학자적 권위에 억눌려, 그의 제자들과 숭배자들의 비난과 욕이 두려워서, 그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떼거리 인터넷 테러가 두려워서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할 것이다.

‘어떠한 질문도 어리석지 않다’는 말은 ‘어떠한 질문도 불경스럽지 않다’는 명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은 학생이건 교수건 모든 학문하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좌우명이 돼야 하지 않을까?

 

김수용 연세대 명예교수ㆍ독일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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