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서 발생한 전대미문의 대형 지진과 원전 사고의 여파는 일본 국민들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주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다. 일본이라고 하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에 담겨 있듯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크고 작은 응어리가 남겨져 있을 텐데도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해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까지도 일본 국민들에게 깊은 위로와 물질적 정성을 모으고 있다.
일본 대지진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맞이해 우리 국민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따뜻한 마음과 진심 어린 정성이 일본 국민들의 가슴에 전해져 장래에 우리와 일본이 가깝고도 가까운 참다운 이웃이 돼 오늘의 이 비극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일본 돕기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의 이심전심일 것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학교 당국의 주도하에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일본 돕기에 나서고 있는 모습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열심이다. 필자가 접해 본 학생들과 사회인들 중에는 사실상 반강제적 모금방식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들도 인도주의적 행동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이 주도하고 온 국민이 동참해 일본 돕기에 쏟고 있는 온정이 감동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냥 흔쾌히 가슴에 와 닿는 것만은 아니다. 인도네시아와 아이티의 재해, 또 그 이전에 있었던 터키의 지진 때에 우리 정부의 지원금과 사회적 성금모금의 열정이 지금의 일본 돕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난한 이웃 국가였더라도 과연 우리 사회가 지금과 같은 열정을 보였을지 의문
스러운 것은 필자만의 삐딱한 생각일까.
혹자는 그들 국가는 먼 곳에 있고 일본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이웃이라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라면, 일본보다도 가까이 살고 있고 한 핏줄인 북한의 기아현상에 눈감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유엔에서는 북한 주민 600만 명 이상에게 43만 톤의 식량을 긴급히 지원해야 한다고 국제사회에 권고하고 있다.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난은 심각하다. 지난해 홍수와 겨울철 한파로 식량사정이 더욱 나빠져 오는 5~7월이면 식량이 바닥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어린이와 여성, 노인 등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영양실조와 여러 질병에 노출될 위험성이 크다고 한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은 유엔권고에 맞춰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 재개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문제의 해법을 찾으러 방북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이러저런 구실을 대면서 북한 돕기에 인색해 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일본 돕기가 올바른 자선이 되려면 상시적으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제3세계 사람들과 북한 동포에 대한 관심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이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 그들은 다시 너를 초대할 것이므로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초대해야 할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지 말자. 그들을 제쳐두고, 훗날 보답의 회식을 기대하면서 부유한 자에게만 선심을 쏟고 있는 것이 일본 돕기에 나서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대학의 교정에 이웃 일본인들에게 정성을 쏟자고 호소하는 총학생회의 펼침막은 넘쳐나는데, 북한 동포에 대한 온정을 요구하는 대학인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음에 가슴이 답답하다.
김해동 편집기획위원 / 계명대·환경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