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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정신이 모두 사라진 대학에 남은 것은…
열아홉 정신이 모두 사라진 대학에 남은 것은…
  •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 승인 2011.04.18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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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의 열아홉 생일선물용 글을 쓴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열아홉은 서울역 근처 순화동에 주거지를 둔, 남루한 재수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던 시절이었다. 술이 더러 위로가 된다는 위대한 진리를 얼떨결에 배우게 된 당시, 재수생의 본분을 망각한 채 동네 양아치들이랑 시비가 붙은 기억도 난다. 하긴 ‘쓰레빠’와 ‘츄리닝’ 차림의 재수생과 순화동 양아치들이 행색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그들 간의 영역 다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고.

다행히 천운이 좋아 재수의 끝은 대학 입학으로 정리가 됐지만, 그 해, 꽃피는 오월, 새벽 기숙사를 급작스럽게 방문하신 공수부대원들에게 오지게 얻어맞는 것으로 열아홉 청춘의 고된 신고식은 시작됐다. 어리바리한 일학년들을 기숙사 앞마당에 쭉 세워놓고 공수부대 장교 분이 장엄한 연설을 하셨는데, 대략의 요지는 빨갱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결국은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주장에는 별다른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여하간 장교님의 연설은 약간 우스꽝스러웠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그 부하들의 군홧발은 많이 무서웠다.

정말로. 눈을 감긴 학생들을 군홧발로 뒤돌려 차기해서 쓰러뜨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군홧발에 채인 사람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실눈으로 훔쳐보는 것은 맞은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이후 중국영화에서 사람들이 붕붕 날아다니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나쁜 기억을 떠올린다. 기구의 도움 없이 사람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무릇 사람은 땅에 붙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 화려한 발길질의 공수부대 청년도 이제는 50줄 가까이 됐겠다. 내 또래나 동생 정도됨 직해 보였던 그 강인한 공수부대원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궁금하다. 한편 묘한 미소를 띠며 꿇어앉은 우리들의 손바닥을 하나씩 검사하던 그 중년의 가죽 잠바 형사 분은 아마 은퇴를 하셨겠지. 자신도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좋아서 한 일이 아닌 것을 그렇게 즐거워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신나게 얻어맞고 쫓겨나는 길에 늘어선 봄꽃들은 하염없이 아름답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이 심야방송에서 들리는 아련한 배경음악으로 들렸다. 급하게 찾아간 친척집에서 라면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에는 눈물이 나왔고, 거울에 보인 그 모습에 웃음도 나왔다.

같은 국적의 군인이 대학 기숙사에 들어와 같은 또래의 청년들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고, 아버지뻘 기관원이 의심이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식또래 학생들의 손을 구둣발로 짓이기며 자백을 강요한 그런 시절이 열아홉 살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철딱서니 없었던 열아홉 나에게 세상의 어떤 것도 나와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잘 가르쳐 줬다. 살아있는 한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까미유 끌로델의 이 작품은‘성숙’을 주제로 하고 있다. 조환규 교수는 미성숙과 성숙 사이의‘열아홉’정신의 고유성을 교수신문과 교수사회가 간직하길 기대하고 있다.

‘1’과 ‘19’외에는 나눠지지 않는 고고한 숫자

열아홉은 매력이 있는 소수(prime number)다. 즉 근본의 단위인 ‘1’과 자신을 나타내는 ‘19’외에는 어떤 수로도 나눔을 허락하지 않는 고고한 숫자다. 2와 3, 그리고 6과 9, 온갖 잡스런 숫자로 분해를 허락하는 ‘18’은 그 발음만큼이나 불경스러운 수가 아닐 수 없다.

사람 나이 열아홉은 한 상태에서다른 상태로 전이(transition)가 일어나는 가장 불안한 시간이기도 하다. 금지와 허락이 공존하는, 숨어 피우는 담배만큼이나 즐거운 연옥의 세계이며, 양립할 수 없는 두 배반된 세계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의 양자역학이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동시에 넓이도 부피도 길이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히 작은 개체로만 존재하는 상상 속의 세계이기도 하다. 전이의 시간은 항상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애절하다. 만개한 연백색 벚꽃이 유달리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며칠 뒤면 바람에 흩날려 모조리, 그리고 깨끗하게 사라져 주기 때문이다.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고,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그 자격증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찰나의 아름다움이 퇴화될 가능성을 영원히 봉쇄해 버리기 위해서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에 불을 지른다. 클로르포름에 담가두는 것보다,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지의 마지막과 허락의 시작이 혼재된 열아홉은 실제의 즐거움 그 자체보다 더 묘한 즐거움을 준다. 반가운 손님이 오기 바로 직전 마지막으로 테이블에 숟가락 젓가락을 줄 세울 때, 그 때가 더 즐겁다. 그래서 손님은 올 때 즐겁고, 갈 때 즐겁다 하지 않는가.

벼르고 벼른 해외여행을 앞두고, 설렌 마음으로 마지막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여행 가방을 몇 번이고 다시 털어서 챙겨볼 때가 더 즐겁지 않은가. 여행지에서의 다양한 풍물보다, 떠나기 전의 부산함과 온갖 공상은 얼마나 안전하며 무한확장이 가능한 즐거움인가.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일로 갈등을 하는 것은 얼마나 우아한 고민인가. 실상은 책장도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들고 올 책이라도 이 책이 좋을까 저 책이 좋을까 1차 2차 3차 선발과정을 통해서, 무수히 가방에서 꺼냈다 뺏다 하기를 반복하는 일에는 열아홉의 즐거움이 숨어있다.


세속의 노련함 좇는 교수 많아져서야

도착해서 벌어질 여행지에서의 황당함은 꿈에도 모른 채, 수영복과 카메라를 매만지며 상상에 빠져드는 일은 열아홉의 희망과 닮아있다. 멋진 교향곡 연주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연주 바로 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음정 고르는 소리 또한 설레고 아름답다. 튜닝소리와 비슷한 베토벤 9번 교향곡의 시작은 그래서 우주가 열리는 소리라고 하지 않는가.

그 소리는 전형적인 열아홉의 소리, 지옥의 땅과 천상의 하늘을 연결시켜 주는 혼란스런 열아홉의 음성으로 나에게 들려온다. 교수는 항상 열아홉 살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청춘의 순진함과 동시에 책임 있는 세속의 어른으로서의 성숙함, 교수가 아니면 누가 모순된 이 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배반된 성질의 이 둘을 가지고 있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고뇌하며 진동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치한 고집에 빠져 유아기적 권위에 파묻혀 있어서도 안 되지만 대학 밖의 사람보다 더 세속화가 돼 속세의 앞잡이 행각을 하는 것을 성숙함으로 착각 또는 호도해서도 안 될 말이다.

주위를 보면 청춘의 순결함을 가진 교수보다는 세속의 노련함을 좇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대학은 갈수록 흥미가 사라지고 있다. 모든 것이 결정돼 정해져 내려오는 세상은 청춘의 시절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은 못할 망정, 그런 사람을 괴롭히고, 그 일에 삶의 보람을 느낀다면 어디 선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법인화가 진행되고 무한경쟁으로 성과급 따먹기가 본격화되면 우리 모두의 나이를 한 스무 살이나 더 올려줄 것 같다. 대학에서 열아홉 청춘의 교수는 남아나지 않을 듯 싶다. 매사의 일마다 “이 일은 한다면, 나의 업적평가에 몇 점이나 보태어 줄 건가요?” “저 일은 연봉에 얼마나 플러스가 될 것인가”로 환치해 해석하도록 강요된다면, 대학에서 열아홉의 희망과 풋풋함은 멸종될 것이다. 싹도 남김없이 모조리.

열아홉 정신이 모두 사라진 대학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유치한 어린이와 닳고 닳은 뺀질이 속물들로만 가득할 것이다. 이러한 삭막한 공간이 찍어낼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불경한 것, 불순한 것조차도 상상할 수 있고, 어떤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 그 열아홉 경계면의 정신을 대학은 지켜야 할 것이다.

세상은 대학에 열아홉의 정서를 허락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그나마 지켜주는 최소한의 소독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아홉 살,  <교수신문>의 생일을 축하하며 어떤 봄날 이런 저런 생각을 내 멋대로 해본다.


조환규 부산대ㆍ컴퓨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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