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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을 가르칠 것인가 '겸허'를 배울 것인가
계몽을 가르칠 것인가 '겸허'를 배울 것인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4.12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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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우리시대의 과학(자)에게 묻다

지난 3월 일본 동북부에서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재난은 결국 4월의 '봄비'에 방사능이 포함돼 맞으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는가라는 이상한 논법으로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원자력 에너지를 둘러싸고도 끊임없이 안전성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도대체 '과학'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 그렇다면 또 과학자는 어떤 존재일까.

여기 두 권의 책이 있다. 코펜하겐경영대학원 교수인 앨런 어윈의 『시민과학』(김명진,김병수,김병윤 옮김, 당대, 2011.4)과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인 후쿠오카 신이치의『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2011.4)이다. 이 두 책은 흥미롭게도 한 점으로 수렴된다. '과학은 시민에게 무엇이며, 과학자는 이 세상에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영국의 사회학자 앨런 어윈의 책은 1995년에 출간됐다.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문제의식은 곱씹어볼 만하다. 과학과 일반시민의 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윈은 일반시민을 '무지'하고 '감정적'인 존재로 보고, 따라서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기존의 과학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과학과 일반시민의 관계를 좀더 '대칭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시민의 편에서 과학을 바라보면 과연 어떻게 보일까?"라는 송곳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답변을 위해 준비한 자산은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의 위험사회론, 1980년대 이후 만개한 과학지식사회학(SSK)의 연구성과, 대중의 과학이해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등인데, 이는 저술시점인 1995년의 관점에서봤을 때라야 '새로운'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윈은 과학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무지와 오해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생각과 단절하고, 역으로 현재 과학의 인지적, 제도적 구조가 시민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부조화와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몇몇 과학 환경 논쟁들을 분석하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특히 어윈은 '실천적 함의'를 강조하면서 '과학상점'과 같은 공동체기반 여구를 과학과 일반시민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는 맹아적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역자들의 지적대로, 어윈이 문제의식을 좀더 발전시키거나 부분적으로 수정한 새로운 책과 논문들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접근은 우선 재미있다. 딱딱하지 않아서 읽기도 쉽다. 책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과학자인 저자는 "더 미세하게, 더 마이크로적인 관점으로 세상에 잣대를 들이대는 과학자들은 결국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며, 세상의 많은 '부분'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고, 결국 인간은 보려고 하는 것밖에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은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는 괴테의 주장을 닮았다.

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베네치아파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두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과 「코르티잔」을 불러와 자신의 분석을 이어간다. 뱃놀이에 여념이 없는 귀족을 그린 「라군에서의 사냥」에서 아래쪽에 있는 꽃의 정체는 늘 의문점이었다. '고급창부'라는 뜻의 「코르티잔」속 두 여인의 공허한 시선과 그녀들의 고급스러운 의상과 배경 역시 많은 해석을 부추켰다. 그러나 마침내 LA와 베네치아에 따로 떨어져 있는 이 두 작품이 함께 만났을 때, 모든 비밀이 풀렸다.(그림 참조)

원래 하나의 그림이었던 이 작품을 한 탐욕스러운 미술상이 돈을 위해 어디에도 없던 선을 그어 위 아래를 잘라 팔아 버렸던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전체를 바라볼 때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 이어진다.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눴다고 해서 정말로 아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한눈에 세상 전체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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