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7:45 (금)
비극적 운명과 내적 수양이 만든 깊이
비극적 운명과 내적 수양이 만든 깊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4.05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_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이진선 지음, 한길사, 2011.3)

 

이광사, 「초학장지해법종요」. 원교 서법의 종지를 나타낸 이 글씨는 예서의 자형과 획법을 따르면서도 해서의 필법을 일부 가져왔다.
18세기 조선후기 문예 부흥기의 대표적 서예가로, 양명학을 탐구한 하곡 정제두의 학맥을 이으며 '강화학파'의 중심에 섰던 圓嶠 李匡師(1705~1777)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강화학파의 서예가 이광사』가 출간됐다. 이광사는 문집 『圓嶠集選』『斗南集』 등을 통해 역사·문자학·음운학·서예·그림 등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저자는 성신여대와 경희대에 출강하고 있는 이진선 박사다. 일찍이「난정서를 통해 본 '왕희지 서예의 특질'에 관한 소고」등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학예일치 속에서만 서예가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 온 그가 '이광사'를 조명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저자가 이광사에서 발견한 것은 '새로운 서법의 탐구와 서예정신의 회복', 그리고 그런 그를 통해 오늘날의 서예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광사가 탐구한 서법은 '東國眞體'였다. 저자에 따르면, 왕손으로서 명필가문의 자제로 태어난 원교는 강화학을 이끈 정제두와 당대 제일의 서예가였던 윤순을 스승으로 삼아 최고의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았다. 또한 당대 최고의 서화 收藏家였던 김광수가 원교에게 자신의 古董書畵를 보여주어 추사에 앞서 고비첩을 탐구할 수 있게 했다. "원교는 이들을 둘러싼 18세기 문예기풍의 주역들과 교유함으로써 이서, 윤두서,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의 맥을 이으며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시켜 나갔다."

또 하나 서예가로서 원교의 면면은 서예의 본질을 환기한다는 점에 있다. "서예의 본질이 무엇인지, 서예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미적 경지가 어디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원교의 신념이었다. 저자는 이 '바른 길'을 '학문을 통한 올바른 필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직 작가가 서법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자기 확신 속에 정진해야 참다운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원교가 일생동안 서법을 탐구하고 경험해 터득했던 요결들을 정리해『書訣』을 집필했지만, 그의 사후 9년 뒤에 태어난 후배 추사 김정희의 신랄한 비판으로 "추사에 심취된 많은 문화 인사들은 원교를 낮게 평가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추사의 강한 비판이야말로 원교의 서풍과 서론의 영향력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원교는 이 시대에 왜 조명돼야 하는 것일까. 동국진체의 맥을 이은 서예가라서? 강화학파의 사상가였기 때문에? 저자가 주목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곧았던 정신'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교의 가문은 사실 을해옥사(1755년 羅州壁書事件)로 풍비박산 나고 만다. 백부 이진유에 대한 연좌로 원교 항렬의 여섯 형들은 갑산부로, 열 명의 동생들은 영남으로 유배됐다. 원교 아내 역시 이 때 목매어 自盡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개인과 가문의 비극,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원교는 경학·패관잡서·문자학·음운학에 이르는 다양한 지식을 『두남집』에 쏟았다. 물론 이것은 서릿발 같은 권력의 비수를 피해가기 위해 일종의 보신책일 수도 있지만, 그가 家禍를 입은 자손들에게 자숙과 근신, 내적 유양을 바탕으로 한 학예 연찬을 강조한 대목을 보면, 개인의 운명이 승화된 경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원교의 가르침을 따라 한국 근대 지성사의 선 굵은 획이 하나 그어졌다는 점이다. 그의 두 아들 긍익과 영익이 각각 『연려실기술』,『신재집』을 저술, 실학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됐다. 또한 "원교의 학맥은 두 아들과 함께 조카 충익을 필두로 후손인 면백→시원→상학→건창 등으로 이어지면서 가문 자체가 강화학파의 주맥을 이룸으로써, 새롭게 조명받는 집안으로 거듭났다."

이 책은 저자가 스스로 밝혔듯, 오랜 세월 강화학파의 인물들을 연구해온 스승 정양완 선생(1922~)의 연구에 많은 부분 힘입었다. 원교의 학통이 구한말 이건창에게로 이어진 것처럼, 그들의 학맥을 연구한 노스승과 제자의 和答 또한 그윽하기만 하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