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과 민족정신
문헌학과 민족정신
  • 서장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 독문학
  • 승인 2011.04.0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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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서장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 독문학

서장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
독일인들의 인문학 전통 고수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독일인들은 인문학을 신뢰한다. 인문학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민족정신 자체는 인문학적 전통위에서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부터 인문학 전통을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기 시작한 독일은 20세기 초 유럽 인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다. 마르틴 루터의 성서 번역을 시작으로 바로크 시대 문헌학자들의 독일어 정화운동은 괴테와 쉴러, 칸트와 헤겔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결과의 산물인 국민문학과 계몽의 철학은 독일을 시인과 사상의 나라로 세계무대에 서는 토대를 마련했다.

독일의 인문학은 인문학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분야에 깊숙이 스며들며 자양분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인문학적 토대로부터 출발한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음악 등 독일의 모든 학문과 문화는 20세기가 되며 유럽의 선두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문학적 정신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본질에 대한 설명방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항은 ‘문헌학’이다. 인문학에 대한 정의는 각양각색이지만 ‘문헌학’을 배제한 인문학 정의는 신뢰하기 어렵다. 문헌학이란 그리스어의 “단어에 대한 사랑”이란 뜻을 지닌 “필로로기아 φιλολογια”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어의 ‘필로로기아’는 라틴어의 ‘필로로기아 philologia’로 전래됐고, 라틴어의 ‘필로로기아’는 영어의 ‘philology’, 독일어의 ‘Philologie’, 프랑스어의 ‘philologie’, 이태리어의 ‘filologia’라는 용어로 변형됐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문헌학을 “단어에 대한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언어학과 문학을 하나의 전공으로 종합해서 다루는 대학 내의 한 학과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쉽게 말해 영어영문학, 독어독문학, 불어불문학, 노어노문학 등의 학과를 표기할 때 쓰이는 용어가 바로 ‘문헌학’이다. 그렇다면 대학 내의 어문학 관련 학과들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

어문학 관련 학과들의 교과 내용은 서양의 ‘고전어문학과’가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어문학과’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습득을 위해 기초적인 문법부터 시작한다. 문법을 습득한 다음, 문장에 대한 이해를 거쳐 고전적인 작품을 번역하고 주해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고전어 문체론 연습과 모국어를 고전어로 번역하는 연습을 한다.

독일인들은 서양 고전어를 습득하며 인문주의자들이 제시한 ‘문법에 대한 이상’을 특히 진지하게 수용했다. 문법에 대한 이상은 “분명, 정확, 그리고 우아”로 압축된다. 말이나 글의 주제는 ‘분명’해야 하고, 단어와 문장은 ‘정확’해야 하며, 여유가 되면 ‘우아’하자는 것이다. 고전어 문법 개념은 그대로 독일어 문법의 이상으로 수용됐고, 더 나아가 ‘분명, 정확’은 독일인의 민족정신을 형성하는 근간을 제공했다. 문법에서 도출해낸 ‘분명’과 ‘정확’, 그리고 ‘단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독일 중세의 ‘신뢰’와 ‘명예’등에서 얻어진 독일 민족정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힘을 과신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인문학 전통의 일부를 20세기 전반기에 스스로 불태우는 과오를 범했다. “독일어를 주제넘게 망치는 것을 반대하고 우리민족의 최고 가치 있는 자산보호를 위하여!”, 그리고 “불멸의 독일정신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위하여”라는 표제어를 내 걸으며 나치세력은 책을 불태웠다. 분서사건은 분명히 인문학의 맥락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소행이었다. 20세기 전반기 글을 아는 문맹자들의 행동은 무모했지만, 인문학 정신으로부터 “민족의 최고 가치 있는 자산”과 “불멸의 민족정신”을 창출한 역사는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대단한 일 보다도 더 놀라운 일은 글을 아는 문맹자들의 행동을 미리 예견하지 못하고 막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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