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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지적풍토는 언제쯤…
인문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지적풍토는 언제쯤…
  • 김영한 서강대 명예교수
  • 승인 2011.04.0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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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남도기행 단상 / 김영한 서강대 명예교수

김영한 서강대 명예교수 사학
올해는 봄이 늦게 오려나 보다. 며칠간 날씨가 온화하여 봄이 오나 했더니 다시 꽃샘추위가 닥쳐와 날씨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일본 도호쿠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비상, 리비아 내전 등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봄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봄을 맞으려 훌쩍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지난 주말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원에서 자연을 벗 삼아 칩거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그를 안내자로 해 발 닿는 대로 지리산 지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우선 전설과 풍류가 어려 있는 광한루와 한일합방 때 자결한 매천 황현의 생가를 방문했다. 선종의 중심지였던 실상사를 찾았을 때는 마침 일몰 무렵이라 천년사찰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가 잠시나마 나그네의 세속적 번뇌를 잊게 했다.

우리는 남원에서 일박하고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번 걸어 보고 싶어 하는 섬진강 백리 길을 아침 일찍 차로 달려 매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만개한 매화꽃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통영으로 기수를 돌렸다. 통영은 듣던 대로 예향이었다.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등이 이곳 출신이었다.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문학관을 구경하고 박경리 묘소를 참배했다. 묵도 후에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와’하고 탄성이 나왔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한산도 앞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은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이태백의 ‘별유천지 비인간’을 연상케 했다. 내려오는 길에 월정수석관에 들렸다. 50년간 수집한 기기묘묘한 수석도 수석이지만 90세가 넘은 관장부부의 극진한 환대가 오롯이 마음에 전달돼 봄 햇살처럼 따사롭게 느껴졌다.

수석관을 뒤로하고 여행의 종착지인 남해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서울과 하동과 남해를 오가며 주경야독하는 HK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초행길이라 묻고 물어 찾아간 곳은 남해군 남면 해안가였다. 차 한 대가 가까스로 다닐 수 있는 벼랑길 언덕을 넘어서니 여수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석양이라 낙조에 붉게 물든 여수 앞바다의 아름다움은 한산도 앞바다의 그것과는 또 다른 정취를 풍기고 있다. 아무리 둘러봐도 경작지가 안보여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가리키는 곳은 온갖 잡초와 잡목이 뒤엉켜 있는 산비탈의 황무지였다. 이 황무지를 얻기 위해 멀리 남해까지 내려 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 땅을 사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전망이 좋고 둘째, 값이 싸고 셋째, 일거리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세 번째와 관련하여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일할 때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잔병도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일은 힘든 노동(labour)이 아니라 즐거운 작업(work)이며 일종의 창조적 예술이었다.

그가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주말이면 남도에 내려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도 연구 활동 또한 왕성하게 계속해 왔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주경야독하는 옛 선비정신을 체현함으로써 실용적 인문학이 판을 치는 오늘의 지적 풍토에서 순수 인문학이 나아갈 방향의 한 유형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를 기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유토피아인이라 할 수 있다.

현대는 평가의 시대다.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공정성과 객관성이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양적 평가가 질적 평가보다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 평가에서 질적 평가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사고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인문학의 평가는 더욱 그러하다. 평가의 방법을 달리하려면 매뉴얼을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연구비 지급은 연구프로젝트에 대한 평가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연구결과와 성과에 대한 평가만으로도 선정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긴 안목으로 묵묵히 연구에 전념하는 인문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지적 풍토가 조성되기를 기대해본다. 

김영한 서강대 명예교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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