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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통합방안’ 제시한 귄터 그라스 초청 ‘통일과 문화’ 심포지엄
‘문화적 통합방안’ 제시한 귄터 그라스 초청 ‘통일과 문화’ 심포지엄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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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8 19:08:18
1989년 가을 내내 동독 전역을 달궜던 민주화의 열기는 마침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허물었다. 하지만 ‘통일’이라는 구호는 11월 20일 라이프찌히의 대규모 집회에서야 돌출한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독일 통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독일 통일’과, 여기서 말하는 ‘동독 혁명’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다른 의미의 이름이다. 볼프 비어만이나 귄터 그라스와 같은 독일 지식인들은 ‘동독 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민중의 힘은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자본주의의 탐욕과 횡포를 막아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는 “동독 혁명은 억압적 지배체제를 타파한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혁명의 주체세력이 그들이 추구하던 목표를 실현하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런 진단은 동독을 탈출한 비판적 지식인 볼프 비어만이 혁명 끝에 알에서 나온 동물이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악어였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는데서도 읽혀진다.

서독 출신 작가 귄터 그라스는 ‘준비되지 않은 통일’의 위험성에 대해서 일찍부터 경고하고 비판한 인물이다. 지난 달 29일부터 이틀간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통일과 문화’ 국제심포지엄은 귄터 그라스로부터 아직도 ‘통일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독일의 경험을 들어봄으로써 분단 한국의 진로를 모색한 뜻깊은 자리였다.

“흡수통일이 진정한 통합 파괴했다”

첫날 토론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기조발제자로 연단에 나선 귄터 그라스는, 동독 사람의 입장에서 쓴 자신의 작품 ‘광야’에 대한 이야기로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그는 “독일 통일은 지면을 통해 이뤄졌다”고 단언하며 일방적인 흡수통일이었던 ‘독일 방식’에 대해 거침없는 질타를 가했다. 서독 기관법에 통일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제정하도록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 부작용이 적은 통일방식에 대한 논의를 원천봉쇄한 점, 그 결과 서둘러 도입된 서독화폐의 위력 앞에 동독의 생산시설의 90%는 서독의 새로운 소유주들 손아귀에 쥐어진 점 등을 열거하면서, 만 7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거친 독일어 발음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는 독일의 통일이 고르바초프의 측면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한반도의 경우 미국이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용인이라도 해야한다면서 “부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몰아붙여 새로운 적의 모습으로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라스는 독일 통일의 실수에서 자신이 깨달은 세 가지 교훈을 한국인들에게 당부했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존경. 전후 서독이 마샬 플랜과 같은 지속적인 지원을 밑거름으로 재건한 반면 동독은 독자적으로 자립했으며 스스로 40여년간의 권위주의적 일당독재를 물리쳤으나, 통일은 ‘가난한 동독인과 부유한 동독인의 만남’이 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 한 가지는 ‘접근을 통한 변화’. 이 표현은 독일의 평화적 교류를 시작, 통합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되는 1960년대 후반의 빌리 브란트가 사용했지만 결국 통일을 완수한 1980년대 후반의 헬무트 콜은 이 금과옥조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연방제 등을 통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상대가 경제적으로 회복해서 어느 정도 힘을 갖춘 동등한 파트너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한 가지는 계속적인 문화적 교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독일이 정치·경제적으로는 분단됐을지라도 한 개의 언어를 공유하고 헤르더의 계몽주의적 교양을 함께 한 경험으로 인해 문화적인 삶은 분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예로 통일 후 동독작가들의 ‘국가예술’의 ‘역사의 쓰레기’로 내쳐버리지 않았고 문인클럽을 통한 교류도 활발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라스 발표의 요지는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통일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문화적 공존’으로서의 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요지에서 그라스는 훗날 남북이 바람직하게 통합하기 위해서 북한인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번영을 조건 없이 도와주며 어디서든 계속 문화적 교류를 계속해달라고 주문했다.

토론에 나선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는 그라스의 ‘문화적 공존’ 주장에 대해서 일단 공감을 표했지만 그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독일은 전쟁 가해자로서 분단을 맞이했지만 한반도는 피해자로서 분단을 감수해야한 커다란 역사적 차이가 있다”며 “‘강한 독일의 통일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한국의 통일에 대한 필요’ 논의로 전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동독의 공산당에 저항, 탈출 후 서독에서도 저항적 지식인으로 남았던 볼프 비어만과 같은 자유로운 지식인을 계관시인과 공인된 작가들로 점철된 북한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한의 지식인, 문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불고지죄, 적성국 회합 등 여러 가지 현행법상의 문제가 있다는 현실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문화적 교류가 동질성으로 수렴되지 않고 다양성을 보전하면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라스의 발표에 이어 백낙청 서울대 교수(영문학)는 분단체제 극복 방법으로서, 현존 세계체제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되 민중의 역할이 커야 한다고 역설했다<하단 기사 참조>. 토론자로 나선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로부터는 “민중의 역할과 지도적 역할을 떠맡을 계층 등에 대한 전략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자신의 이론체계에서 민중의 구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던 점을 인정하면서 6월 민중항쟁기념행사가 반전평화운동의 취지로 열리는 것에 주목, 민중운동이 분단체제 극복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평가했다.

마지막 기조강연자로 나온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신문방송학)는 ‘독일의 동방정책과 한국의 대북정책’이라는 주제로 한국인에게는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 독일인에게는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해서 설명함으로써 귄터 그라스와 백낙청 교수의 의견을 보충설명하는 모양새를 가졌다.

최 교수의 발표에서 주목받은 대목은 빌리 브란트의 이른바 ‘동방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닌, 평화가 심지어 정의나 통일보다도 앞서는 것을 간주한 ‘평화정책’이자 ‘비통일정책’이었다는 주장. 최 교수는 “브란트는 ‘어떤 헛된, 기만된 희망도 버리라’며 공식석상에서 통일을 낙관하거나 희망하는 모습을 삼갔다”고 말했다. 그에 비하면 일관되게 분단 이후 지속되게 국토통일, 조국해방 등의 수사를 남발해왔지만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 2000년 정상회담을 거치면서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한반도의 통일정책은 외화내빈의 형국인 셈이다. 최 교수는 통일이 “예측가능한 미래에는 불가능하다”는 빌리 브란트 식의 언술과 “20~30년 뒤에나 가능하다”는 현정부의 진술을 비교하며 “차라리 정직하다”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분단상황의 ‘현실주의적인 이해’와 더불어 부모의 장례식과 자녀의 결혼식을 왕래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인 접근’에서 시작한 독일의 ‘작은 걸음의 정치’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1969년 귄터 그라스의 말을 인용해 “우리 모두가 모택동식의 대약진을 감행하려고만 할 때, 나는 진보란 달팽이라고 말했다.그렇지만 달팽이는 앞으로 나간다”는 말로 자신의 발표를 마무리했다.

문화적 접근을 통한 상호변화 이뤄야

이에 대해 이우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통일 담론은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접근 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평소 통일의 당위성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면 8할 가량이 지지하지만 남북정상회담 직후 등에서 6할 가량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정책담당자들의 통일담론은 남북관계가 잘 되지 않을때 내세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토론을 마치면서 그라스는 남북한의 교류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북한은 좀 더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남한은 좀 덜 미국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었던 서독인을 마치 승리자나 식민지배자들처럼 만드는 대신, 동독인이 이류독일인으로서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독일의 모습을 반복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로서는 기아상태의 북한을 무조건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권진욱 기자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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