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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시대의 의사와 ‘환자’
기술시대의 의사와 ‘환자’
  • 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11.03.2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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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기술시대의 의사와 ‘환자’

『기술시대의 의사』(김정현 역, 책세상, 2010)는 칼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에 관한 책이다. 철학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실존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칼 야스퍼스가 의사였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기능화된 근대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고 철학적 호흡을 불어넣으려는 그의 노력 또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통섭적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883년에 태어나 1969년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학문적 이력은 법학에서 의학과 심리학, 철학으로 옮겨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철학자로서의 야스퍼스의 면모는 후기의 철학적 저서들에서 확정되지만, 그러한 실존적 사유가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 교수로서 체험했던 환자와 심리치료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의 사유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끔 한다. 이 책에는 「의사의 이념」, 「의사와 환자」, 「기술 시대의 의사」라는 세 편의 의철학 논문과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이라는 두 편의 심리치료에 관한 논문이 실려있다.

앞의 세 논문에서 야스퍼스가 지적하고 있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은 거대화된 의료 경영과 자연과학의 맹신 속에서 실종된 ‘의사의 이념’이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 인식과 기술력’, 또 한편으로는 ‘휴머니티의 에토스’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어야하는 의료행위는 마땅히 자신의 전문적 인식을 통해 ‘질병’이 아니라 ‘환자’라는 인격체, 인간 일반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과 실존적으로 소통하고 이들의 삶의 의미를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는 이러한 의사의 이념을 요레스의 말을 빌려 “치유는 단지 의미로 충만한 길 위에서만 가능하다”라든가, 히포크라테스의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라는 말을 빌려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신에 가까운 의사, 과거 성직자와 하나였던 의사의 위상이란 현대에서는 기대해볼 수 없는 하나의 이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지만, 현대의 보편화된 의료 체험을 상기해볼 때, 이 이념의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현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예약, 접수에서부터 대기, 그리고 그 수고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면담과 진료, 수납에 이르기까지 종합병원에서 환자는 거대한 컨베어벨트 공정에 올려진 하나의 ‘물체’가 된다. 진료에서 환자는 우려되는 질병의 증상만을 질문 받고, 증상은 의료기술에 의해 수치화된 것 안에서만 의미있는 것으로 검토된다. 병원에서 우리는 의료기계를 상대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병원과 의사의 최첨단 기계 의존도 또한 절대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공정에서 우리는 삶의 곤궁에서 빚어진 ‘질병’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단지 객관화된 ‘질병’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런 시스템에서 의사가 환자의 실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란 기대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결과 환자 또한 의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 대신 의심과 회의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주변의 지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상적인 병리에서부터 전문적인 병리에 이르기까지 의사 못지 않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의사를 고르고 스스로를 진단하며, 때론 의사의 소견에 반하는 치료 방법을 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즉, ‘의사의 이념’ 못지않게 의사를 믿고 신뢰하며 ‘질병’뿐 아니라 자신을 실존적으로 기투하는 ‘환자의 이념’ 또한 상실된 것이다.

 기술의 대중화의 정보화 시대 덕분에 소수 엘리트의 독점물이었던 전문지식은 일반 대중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즉, 무지와 미개로 해방되어 현실세계를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진정한 계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거 IMF와 경제위기는 국민들을 경제 전문가로,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광우병 전문가로, 줄기세포파동은 생명의학 전문가로, 줄리안 어산지는 국제정치분석가로, 일본 지진은 지질학자와 원전 전문가로 바꾸어놓았다. 이 기술적 대중화 시대에 지식 권력은 민주화되었고 동시에 전문가는 그 독점력과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 민주화의 도래와 더불어 우리는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한 대혼란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문적인 지식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어떤 확고한 진단도 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이 계몽의 역설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수치와 계량, 통계, 과학적 분석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의 무한한 계기, 그 엄청난 사태를 우리는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에서 보았고, 또 기업가의 윤리와 인류가 화합할 수 없는 근대 문명의 부조리를 보고 있는 중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이러한 재난조차 이제는 일상화되어버려 무감각해져버렸다는 것. 대지진, 구제역, 신종플루, 사스, 전쟁을 비롯한 언론, 정치가, 과학 기술자, 전문가, 기업의 협잡과 사기에 이제 우리는 새삼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환자의 실종! 한 시인의 말대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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