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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대한 회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대한 회상
  •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 승인 2011.03.21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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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일이지만, 대학시절에 가끔 도서관에 들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뒤적이곤 했다. 에드윈 셀리그만이 편집한 『사회과학 대사전』과 함께 그 당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 지식의 보고였다. 이 사전이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주도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사전 출판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에든버러의 인쇄업자인 앤드류 벨이 처음 편찬 계획을 세우고 윌리엄 스멜리에게 편집 작업을 맡겼다. 스멜리는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 이를테면 애덤 퍼거슨, 볼테르, 벤저민 프랭클린,  새무얼 존슨 등에게 집필을 의뢰하거나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1771년에 간행된 세 권짜리 초판은 발간 직후부터 오류와 부정확한 기술로 비판을 받았다.

이에 자극 받은 벨은 십여 년 후에 10권짜리 재판을, 그리고 1801년에는 20권짜리 3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사전이 프랑스백과사전 못지않게 높은 평판을 얻게 된 것은 아마 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브리태니커사전은 영국을 상징하는 유력한 아이콘이 되었다.

초기 판본들의 변화를 추적하면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인내와 노력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한 인쇄업자의 출판을 넘어서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총동원된, 그 시대 지식의 총화를 집대성하는 작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사전에 커다란 자긍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에서 이 방대한 사전을 편찬해 영국문화를 주도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8세기 후반 스코틀랜드의 지적·문화적 성취는 같은 시대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대서양 건너편 스코틀랜드의 지식인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 세계의 어느 곳도 에든버러와 경쟁할 수 없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운동의 동력은 대학제도에서 나왔다. 근대 초기 스코틀랜드 개신교 지도자들은 교회 개혁에서 더 나아가 대학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이 영적 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기를 소망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대학으로 몰려들었다. 에든버러, 글래스고, 에버딘, 세인트 앤드루스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다.

한편 이 시기 지식인들의 활동은 당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다. 잉글랜드와 합병 이후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더 이상 잉글랜드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다. 지식인들은 현실정치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초극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기 나라 전통과 문예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정규교육의 바깥에서 자신을 단련해나간 사람들에게도 이 사전은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새무얼 스마일스의 『자조론』(1859)은 어려운 환경 아래서 독학으로 자기함양을 이루어 나간 사람들을 소개한다. 하원의원 윌리엄 잭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시절에 부친과 사별한 후 가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선박회사에서 고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마침 책장에 꽂혀 있는 백과사전 전집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통독했다.

대학 시절에 내가 이 백과사전을 즐겨 뒤적였던 것은 지적 허영심이나 속물근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의 허영심마저 지금은 내게서 찾기 어렵다. 백과사전도 나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요즘에는 참고할 사항이 있으면 위키피디어를 이용할 뿐이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간편하게 각종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만,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열망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사전 자체의 역사도 책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한 세대 전에 소유권이 시카고대학으로 넘어가더니 이제 전집형태의 개정판은 더 이상 출판되지 않는다. 콤팩트 디스크를 통해서만 새로 첨가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금박 장정의 사전에서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속물근성은 1970년대 우리사회의 집단의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서울 강남지역의 개발과 함께 새로운 양옥주택이 들어서던 그 시절에 이 사전은 수만 질 팔렸다. 브리태니커 본사에서도 한국인의 지적 수준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 당시 사전 구입자 가운데 이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은 넓어진 응접실과 환한 벽면을 채워줄 장식물로 구입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의 속물근성이 그립다. 책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오늘날 그 허영심마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니까 말이다.

이영석 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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