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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건국기념일에 있었던 ‘천황제 폐지’ 시위 풍경의 함의
日 건국기념일에 있었던 ‘천황제 폐지’ 시위 풍경의 함의
  • 이혜진 일본 통신원
  • 승인 2011.03.1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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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_일본 천황제의 과거와 미래

2월 11일은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건국기념일이다. 올해 건국기념일 행사에서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가 일어나 일본의 보수단체 및 경찰대와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반천황제 시위는 건국기념일 외에 쇼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쇼와기념일(4월 29일)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난 종전기념일(8월 15일)에도 일어난다.

이 시위는 ‘반천황제운동연합회’를 중심으로 아시아평화협회 재팬, 새로운 안보행동 실행위원회, 개헌과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는 4·29집회 실행위원회, 쇼와 천황 건국기념관 건설저지단, 일한민중연대 전국네트워크,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네트워크, 야스쿠니해체기획 등 총 60여 개의 단체가 참여하는 반체제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쟁 가능성이 부상한 데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국제무대에서의 전쟁 반대와 재일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이들이 천황제 폐지와 행정조직 개혁을 요구하는 데는 현재 일본의 정치·사회체제가 차별을 낳은 원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에서 천황을 부정하는 행위는 ‘불경죄’에 해당했다. 1880년 공포된 형법은 천황과 황족, 신궁과 능묘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를 ‘불경죄’로 명문화해 이에 대해 2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했다. 이는 문학작품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최초로 불경죄가 적용된 작품은 기노시타 나오에의 『남편의 자백』(1906)이다. 소설의 내용 중 도쿄제국대학 졸업식에 왕림한 천황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당시로서는 천황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행위 자체가 불경이었으므로 1910년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1910년은 천황 암살 계획으로 고토쿠 슈스이 등 20여 명이 검거된 대역사건이 발생한 해였다.

일본 근대의 신도와 기독교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불경죄는 1891년 우치무라 간조의 불경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가 제일고등중학교의 교직에 있을 때, 교육칙어에 대한 예식을 거부한 것을 이유로 강제사직처분을 받은 사건은 사회적 문제로까지 발전했다.

이 사건은 천황에 귀의하는 신도가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신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전전의 대일본제국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신도는 서양적인 종교가 아니라 일본인 전체가 신앙으로 갖는 문화의 토대라고 밝히고 있었다. 우치무라의 불경 사건은 개인의 신앙과 신도 사이의 위화감을 적나라하게 들추었던 것이다.

한편 최근 재평가 되고 있는 고바야시 타키지의 『게공선』에도 불경죄가 적용됐고 고바야시는 치안유지법에 의해 체포됐다. 이 작품은 천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없지만, 게공(蟹工)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 자본가의 정점에 있는 천황가가 나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때 게공들이 천황에게 헌상하는 게 상자에 “돌멩이도 넣어라”라고 발언한 부분이 불경죄에 해당됐다. 그 외에도 나카노 시게하루가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에서 “콧수염 안경 새우등의 그”라는 쇼와 천황의 신체를 묘사한 뒤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와 같은 천황 암살을 암시한 표현은 개정판에서 복자 처리를 강요당했다.

이 시기의 불경죄는 우익의 작품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는 혁신 우익의 거물인 오카와 슈메이가 일본의 역사적 이념을 서술한 『일본 이천육백년사』이다. 이 책에서 “일본은 아이누민족의 국토였다”, “조정은 단지 최고 족장인 천황을 의장으로 하는 족장상담소에 불과하다”라는 기술이 문제가 돼 광신적 우익단체인 ‘원리 일본’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쓰다 소키치의 『신대사 연구』도 일본 신화에서 벗어난 역사 기술을 문제 삼아 ‘원리 일본’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대사 연구』는 황통보(皇統譜)를 조사하여 일본신화의 ‘천손강림’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고사기와 일본서기 따위에 의지하지 않아도 일본은 훌륭한 나라”임을 밝힌 실증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의거하고 있었지만, 천황의 절대성을 부정한 쓰다 역시 ‘원리 일본’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이로 인해 『일본 이천육백년사』는 개정, 『신대사 연구』는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것이라 하더라도 역사인식이 다르다면 불경한 책이 됐던 것이다.

패전 이후 1947년 일본국헌법은 ‘불경죄’ 항목을 삭제하고, 천황은 일본과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상징천황제’를 제1장 제1조에 명문화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문화방위론』(1969)에서 문화 개념으로서의 상징천황제를 옹호했다. 일본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포괄하는 공동체의 이념으로 기능하는 천황이란 황제 권력으로부터 초월한 문화의 전체성을 책임지는 존재로서의 천황을 가리킨다. 즉 천황은 국가와 국민의 에고이즘이지만 가장 반대 극에 위치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미시마는 그것을 팔굉일우의 천황제와 구분하여 ‘미적 천황제’라고 불렀다. 미시마는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이 부정되거나 전체주의 정치 개념을 포괄해야 할 때야말로 일본 문화의 진정한 위기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전체주의를 경계하면서 동시에 천황의 ‘외부’에서 천황을 투사하는 사고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통해 자신의 문화를 비판하는 일은 자기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현실적 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언제나 강력한 존재성으로 표상되는 천황 관련 서적은 비판과 옹호를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일본 사회에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이혜진 일본 통신원·한국문학
도쿄외대 총합국제학연구원 연구원이다. 한국근대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외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전 세계 식민지 역사와 문화연구 동향 및 인물동향 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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