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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가면의 웃음, 대중문화의 거짓
[문화비평] : 가면의 웃음, 대중문화의 거짓
  •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 승인 2002.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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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03 17:18:08

박근서/대구가톨릭대·신문방송학

텔레비전에서 그리고 우리의 대중문화 속에서 코미디가 사라져 간다. 주말 프라임 타임대를 차지하던 각 방송사의 간판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심야로 평일로 밀려난 지 이미 오래고, 전통적인 서사적 코미디는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요즘이야 어디 코미디 아닌 것이 있는가. 어차피 모든 것이 코미디인 걸, 따로 코미디라는 장르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부분, 역사극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드라마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웃음의 요소들을 담고 있으며, 그 밖의 수많은 오락 프로그램들은 그 자체가 전통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의 변형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아무튼 그만큼 웃음은 우리 대중문화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와 이제 그것의 기본적 원리의 하나로 자리잡은 듯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이런 웃음의 원리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웃음은 정상, 논리, 상식에서 어긋남으로써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정상, 논리, 상식에서 벗어나는 ‘추악함’에서 유래한다고 보았고, 키케로는 웃음의 원인으로 ‘기대의 배반’을 거론했다. 코미디는 우리를 웃기기 위해서 반드시 놀라게 하는 것, 부적절한 것, 그럴듯하지 않은 것,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사용한다. 그것들은 사회문화적 규범들과, 다른 장르나 미학적 체제를 지배하는 규범들로부터 ‘일탈’을 수행한다. 코미디의 경우, 일반적 관행들은 사회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일종의 ‘무례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웃음의 텍스트는 통상적인 재현적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돼야 한다.

웃음의 텍스트에서는 얼마나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느냐 보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말하느냐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웃음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문화 텍스트는, 일탈과 위반에 의지한다. 그것은 단지 우스꽝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들과 어처구니없는 행동 그리고 허무맹랑한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사회문화적 규범과 규칙을 위반해야 하며, 통상적인 재현적 텍스트의 규범을 무시해야 한다. 웃음의 이러한 위반과 일탈의 정서는 광범위한 해방의 파토스를 낳는다. 그것은 인간 삶의 사소한 억압과 강제를 뒤틀어 일상적 삶의 해방구를 형성한다. 기존의 질서가 무시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보이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그 동안의 강박과 억압이 해체되는 자유와 해방을 맛본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불러일으키는 해방의 파토스는 결코 우리 삶의 근본을 뒤흔들어 그것으로부터 깊은 반성과 해체의 몸부림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대중문화의 웃음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상업적 목적을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웃음에 이끌린 수용자는 대중문화 텍스트에 의해 오직 소비자로 호명될 뿐이다. 대중문화는 오직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와 더불어 혹은 그 밖의 상업적 메시지와 더불어 하나의 제도화된 텍스트 체계 속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화된 텍스트 체계는 대중문화 텍스트의 웃음을, 수용자를 소비자로 호명하는 하나의 유인으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물론 웃음의 텍스트는 재현적 텍스트 일반과는 전혀 다른 원리와 패턴에 의해 직조된다. 동기와 행위의 인과성이 중시되는 재현적 텍스트와는 달리, 웃음의 텍스트는 우연과 반전을 중시한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존의 질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와 복종의 파토스를 그것의 해체와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을 주조로 하는 자유와 해방의 파토스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유인으로 자리매김 된 대중문화의 텍스트는 다만 소비자 호명의 도구로만 이용되지는 않는다. 수용자들의 선택과 자율적 수용이 다양한 해석과 활용을 낳고, 또한 끊임없이 그러한 자연적 태도로부터 일탈하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서 웃음의 텍스트는 현실적 저항과 연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자체로 저항의 고리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 속 웃음이 일궈내는 자유와 해방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머리를 돌리지 않는다. 때로는 뜻 없는 농담이 노여움을 사기도 한다. 노여움을 산다면, 농담은 더 이상 웃음이 될 수 없다. 분명하게 금을 그어 표시할 수는 없지만, 웃음에는 경계가 있다. 상품으로서 대중문화 속 웃음은 결코 이 경계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유와 해방의 파토스보다는 시장에서의 성공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과 일탈 이전에 기율된 신체들이 존재한다. 수용자들의 선택과 자율적 수용은 일상적 수준에서 결코 기율된 신체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대중문화 속 웃음은 대개는 거짓된 가면의 웃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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