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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편집위원회, 무엇을 해야 하나
학술지 편집위원회, 무엇을 해야 하나
  • 하세봉 한국해양대 교수
  • 승인 2011.02.2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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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밀집사육’이란 오명 피하자

 

  근래 대학사회에는 갈수록 경쟁의 논리가 도입되고 연구자들은 보다 많은 업적을 요구받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전보다 훨씬 많은 논문이 생산되고 있다. 논문편수 경쟁이 심화되면서 생명력 있거나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은 드물고 연구자 집단 내부 극소수의 자가소비에 지나지 않는 글만 넘친다는 지적 또한 그냥 흘려버리기 어렵다.

필자 주변의 어떤 연구자는 자신이 학자가 아니라 논문제조기 혹은 프로젝트 선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조감을 표하기도 한다.

한국사회가 처한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그것을 공론화시켜내는 장이 사라지고 있는 배경에는 학술논문 위주의 업적주의도 한 몫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HK사업을 비롯한 국가의 인문학 지원으로 인하여 심포지엄· 콜로퀴엄 등이 빈번히 개최되어 학문영역을 넘어선 연구자의 교류가 활발하나, 학회 발표회의 공동화 현상에 더해, 빈번해진 만큼 지적 긴장감도 지적 유희도 사라지고 형식적인 토론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데 업적주의는 학계 외부로부터 강제된 현상이나 업적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은 학회와 연구소이고 학술잡지이다. 학회는 특정한 영역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이고 회원을 비롯 유관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를 집중적으로 수록해 발간하는 것이 학회지이다. 앞서의 지적이 분명한 문제라면 업적을 만들어내는 현장인 학회(연구소) 그리고 학회지(기관지)에 문제가 있는 걸까.

    편집위원(장) 능력과 역할 제대로 발휘못해
   논문 생산 편수의 증가 자체가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전 발품을 팔아야만 자료를 수집할 수 있고 손으로 자료를 베껴 쓰던 시절과 비교한다면 그동안 학술정보의 수집과 획득 검색 등 연구환경이 크게 변했고 이러한 변화는 연구자 개개인의 논문생산 증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재들만이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그래서 그들이 긴 호흡의 글을 산출하던 시대와 달리 필자와 같은 凡才도 연구자로 생활하는 오늘날의 시대는 경쟁과 같은 일정한 강제가 없으면 쉽사리 나태해지기 쉬움은 우리 주변에서 익히 보는 바이니, 토막글이라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쏟는 정성을 함부로 폄하할 일은 아니다.

 외국학계에서는 학술지의 편집위원장은 학회장에 버금가는 영예로운 자리라고 한다. 편집위원장의 선임에 학자로서의 능력이 우선적 고려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술지 편집에 편집위원이나 편집위원장의 학문적 능력이 발휘될 여지는 별로 없다. 투고된 논문에 대한 심사위원 선정과 의뢰가 편집위원회가 하는 역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사결과가 도착하면 그것을 편집규정에 정해진 대로 기계적으로 적용해 게재 여부를 판정하면 된다. 요즘은 편집회의도 온라인 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심사위원 추천에 소극적인 편집위원도 적지 않아서 시간을 빼앗길 일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에서는 잡지 세 곳 이상의 편집위원을 맡으면 감점하도록 규정해두고 있다.

더욱이 2, 3년 전 구 학진에서는 편집의 수고를 들어준다면서 인문사회분야에 학술지논문관리시스템을 보급하고자 한 적이 있다. 기계적 편집이 당연한, 편집위원회는 무용한 것으로 간주한 발상이고, 자동편집시스템으로 편집의 인위적인 조작을 막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로스쿨 학술지의 서류조작 사례에서 편집위원회에 대한 국가의 불신이 사실무근이 아님이 증명됐다. 다른 분야도 아닌 법을 전공으로 하는 학술지가 불법적으로 편집했다는 건 참으로 희극이다. 세상에 대해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학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자율적 공동체는 외부의 간섭과 강제 없이는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담보하지 못하는 조직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조직이나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원칙이나 상식에 앞서 집단의 논리가 종종 앞서는 것이 한국의 학회라면, 학술지 편집에 대한 공론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누구나 다 아는 연구 생산의 현장에는 침묵하고, 개선안이 연구자 공동체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최근 KCI 연계 학술지등급화나 학회 통합 방안같이 학회운영이 한국연구재단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무감각하다.  

문제의 일부를 짚어보자. 심사과정은 학술지 편집의 핵심이다. 그런 만큼 심사의뢰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편집위원장이나 편집위원이 전화로 미리 심사자의 사정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의뢰를 해야 할 일이다. 이 정도의 수고도 마다한다면 편집위원(장)이 할 일은 없다. 편집조교가 연락하는 경우가 잦고, 심지어는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메일로 심사의뢰서를 보내고. 할 수 없으면 회신하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사자 풀을 학회회원에게만 국한시키기도 한다. 학제적 연구가 많아지는 추세인 오늘날 심사자를 학회회원에 국한시켜서는 심사에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특정한 주제로 소수의 전공자만 있을 경우 투고자의 이름을 지워도 누구의 글인지 쉽사리 알 수 있어서, 해당분야의 전공자라고 하여 반드시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법은 없다. 이 때 편집위원회의 판단이 필요하다.

    학술지 편집에 대한 공론 필요한 때
   학회가 공지한 사항은 투고자와 회원들 스스로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인문사회 특히 인문학계는 40대후반과 50대중후반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하다. 학문후속세대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다보니 편집진이나 투고자나 대략 20년은 서로 아는 인연을 지닌 경우가 많다. 인연에 기대어 투고기일 등에 무신경한 경우가 잦다. 동시에 학회는 실현 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줄간, 자간, 글자 포인트 등을 원고작성규칙에 정해두고 있는 학술지도 많은데, 문서편집에 익숙하지 않은 특히 나이든 연구자들에겐 이런 조항은 곤욕이다. 이러한 사항은 출판사에서 일률적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편집위원은 심사자를 추천할 뿐 심사자 선임에 최종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편집위원이 해당 학술지에 투고를 피할 필요는 적으나, 편집위원장은 해당 학술지에 투고하는 것을 삼가해야 마땅하다.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사자를 자신이 정하고 심사를 의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때로 투고자가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사자를 추천하는 일도 있다. 편집위원회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선의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편집위원이 편집 전반에 관한 정보를 어디까지 공유해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투고자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해서 정보 공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견해와 투명한 편집을 위해서는 정보를 최대한 공유해야 한다는 논리가 충돌할 수 있다. 필자의 경험범위에서는 전자가 우세하다. 그러나 필요할 때만 편집위원 개인에게 연락해 심사자 선정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지나친 보안주의에 흘러서 바람직하지 않다. 특집기획, 이의제기, 자기표절, 중복게재 등의 사안에서 편집위원회의 기능이 살아나야한다. 학술대회를 개최한 후 그 발표문을 특집기획으로 싣는 경우가 많다. 편집위원회가 학술대회의 주제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고, 특집기획 게재 시 편집위원회 혹은 객원편집위원의 집필로 특집기획의 의도와 내용 등을 수록할 필요가 있다. 연구윤리규정을 형식적으로 첨부할 것이 아니라, 관련 사안이 생길 때 편집위원회가 기준과 판정에 관해 활발하게 내부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우리 학계에서는 투고논문은 투고자와 심사자 간에만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편집위원회는 투고논문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상식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편집위원회가 심사자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투고논문의 내용이나 형식에 개입하고자 할 때, 그리고 정형화된 논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지적 일탈과 실험정신도 모색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한국학계의 학술지가 외부의 돈과 평가에 끌려가는 논문의 밀집사육을 면하게 되지 않을까.

하세봉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시아 역사상, 그 구축의 방식과 윤곽' 등의 논문과 <동아시아 역사학의 생산과 유통>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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