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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진'향해 줄서지 않고 '돈 안 되는 공부'에 뛰어든 까닭
'학진'향해 줄서지 않고 '돈 안 되는 공부'에 뛰어든 까닭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1.20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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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1~7권) 출간 이끈 홍승용 대구대 교수

 

대구대 현대사상연구소(소장 홍승용, 독문학)에서 『현대사상』제 7권(사진)을 출간했다. 2007년에 제1권을 출간했으니 꼬박 3년 동안 지적 탐색을 계속해온 셈이다. ‘대구대’와 ‘현대사상 시리즈’에 방점을 치면, 이건 눈여겨 볼만한 작업이 틀림없다.  

문화와 재화, 사람이 모두 ‘서울’에 집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지역에서 차분하게 대안을 모색하는 기본적인 작업에 역량을 쏟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그것도 잘 팔리지 않는 ‘현대사상 시리즈’로 주제를 설정했다는 점도 더욱 그렇다.

시리즈 주제는 ‘현대의 키워드’(1), ‘환상을 넘어서’(2), ‘아방가르드’(3), ‘유물론’(4), ‘사회주의’(5), ‘지젝읽기’(6), ‘변증법’(7)이다.  이번 시리즈는 ‘현대사상 세미나’를 통해 걸러진 논의들로 구성됐다.

현대사상연구소는 자율 연구소라 대학으로부터 받는 지원이 전혀 없다. 그야말로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기 좋아하는  연구자들 스스로의 담론활동인 셈이다. 『현대사상』편집위원에는 권현주, 김겸섭, 김경수, 김선규, 김재훈, 남중섭, 박규준, 변상출, 양진오, 이규환, 이득재, 이병진, 조항구, 최성만, 하영진, 허재훈, 양종근, 홍승용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책임편집을 맡고 있는 홍승용 소장을 만났다.

 

홍승용 대구대 교수.

 

△ 대구대 현대사상연구소에서 이번 『현대사상』(1-7)을 출간했습니다. 공식 ‘서문’이 없는 관계로, 이 시리즈가 기획된 배경과 진행 과정, 참여 방식 등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물론 ‘투고’ 안내한 부분으로 미뤄볼 때, ‘현대사상 세미나’ 등이 모체가 된 것 같습니다. 시리즈의 기획 배경, 진행 과정을 간단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현대사상 세미나에 관해 좀더 언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현대사상 연구소의 출발에는 몇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만, 가장 강렬한 것은 근래에 고착돼온 학진(한국연구재단) 중심의 연구풍토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물론 학진의 지원체계가 만들어낸 긍정적 효과도 큽니다. 일부 비정규직 교수들이 조금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기반이 조성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지요.

허나 바로 이 긍정적 효과가 자율적 연구풍토를 위축시키는 부정적 기능과 맞물려 있습니다. 돈 안 되는 연구에는 신명은커녕 땀 한 방울도 투자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온 것입니다. 정규직 교수들도 평가와 연구비와 연봉 등 성과주의 그물에 별 저항 없이 자진해서 얽혀들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인문학과 대학의 존재기반을 잠식해왔고,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대한 지식사회의 예속관계를 굳혀 왔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현대사상 연구소는 출발 구호를 ‘돈 안 되는 공부모임’으로 정했습니다. 학진을 향해 줄서지 말고, 하고 싶고 해볼 만한 공부를 자유롭게 하자는 데에 동조하는 연구자들의 소박한 성과물들이 『현대사상』인 셈입니다.

현대사상 세미나는 매 학기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대개 12~15회 정도 진행합니다. 교수, 대학원생, 학부생, 일반인까지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예전의 문예미학 세미나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주로 대구대 인문대를 활용하고, 바람이 불면 야외로 나가기도 합니다. 시간 개념은 희박하지만 발제와 토론에서는 끝장 보기를 애호합니다.

10여명의 골수회원들은 문예미학 시절부터 10년 이상 세미나인생길을 함께 누벼왔습니다. 뒤풀이 중에 종종 다음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발제자들이 거론되고 자천 타천으로 토론자들이 정해집니다. 누가 그 주제에는 적임자라는 소문이 나오면 당장 섭외 들어가기도 하고요. 돈도 안 되고 학진 등재지도 아니고 해서 골수회원조차 가끔은 뒤로 빠지고 싶기도 하겠지만, 주제에 끌려 선뜻 발제와 토론을 맡는 연구자들은 앞으로도 쉽사리 고갈되지 않을 듯합니다.”

△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현대의 키워드, 환상, 아방가르드, 유물론, 사회주의, 지젝, 변증법 등 다채로운데요. 이미 많은 논의가 진행된 주제도 있고, 환상이나 지젝 같은 트렌드에 다가선 기획도 있습니다. 앞 질문과 다소 중복될 수 있는데, 기획은 어떻게 잡고 있으며, 앞으로 다룰 주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아도르노가 곧 예정된 것 같습니다만.

“세미나 진행중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욕심이 작동하기도 하고, 우연히 오가는 이야기들 가운데 어떤 주제가 꽂히기도 합니다. 이번 학기에는 아도르노를 다루고 있습니다. 5월 경에 『현대사상』8호로 묶어낼 예정입니다. 다음 주제로는 ‘식민지’가 맴돌고 있습니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탈식민주의, NLPD논쟁 등의 소주제들을 한묶음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울러 지식생산?유통의 식민지성도 진지하게 돌아볼 주제로서 군침을 돌게 합니다.

어떤 회원들은 거창한 주제를 한 학기만 다루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불만스럽다고 합니다. 지젝이나 아도르노 혹은 어떤 이론가든 충분히 따라잡으려면 몇 년씩 열독을 해도 쉽지 않지요. 하지만 선수들이 모이면 나름의 방향설정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욕심을 내자면, 한 학기 세미나 끝날 때마다 세미나와 같은 주제로 『현대사상』과 별도의 책을 한 권씩 쓰면 좋을 듯합니다. 몸은 전혀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만.”

△ 참여 집필진이 다양합니다. ‘대구대’로 한정하지 않고 전국구를 지향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편집위원’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필진 중복을 피하면서 주제를 심화할 수 있는 방안도 있을 것 같은데요?
“돈 안 되는 모임이라 발제나 기고 부탁이 심각한 민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이 자꾸 기피대상으로 돼 가는 것 같아 머쓱해지곤 합니다. 그래도 눈치껏 거부하기 힘든 주제를 뻔뻔하게 들이밉니다. 주효할 때가 많습니다. 세미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회원들을 기본으로 포함하면서, 주제별 전공자들을 가능한 한 폭 넓게 끌어들이려 합니다.

『현대사상』의 약간 삐딱한 분위기에 공감하는 잠재적 필자들은 무궁무진하다고 봅니다. 이때 호소력 있는 주제 선정이 세미나나 『현대사상』의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필진의 다각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허나 세미나를 줄기차게 만들어온 ‘세미나인생들’이 중복해서 필진으로 참여하는 것은 『현대사상』의 주요 동력이라고 보아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 이번 7권까지의 기획 주제를 보면 현실을 보는 더 깊은 눈, 재구성하는 시각, 그리고 여전히 대안적 가능성을 갖고 있는 주제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주제지만, 세부적인 논문들은 상이한 지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세미나 형식에서 빚어진 구성인지, 아니면 이것조차 어떤 의도를 갖고 배치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필자에 대한 기대와 현황이 어긋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기대와 다르다고 가위질할 만큼 자산이 풍부하지는 못합니다. 제 마음이 독하지도 못하고요. 어려운 시절이라 함께 암중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양보 없이 논쟁하되 다른 입장들에 대해 조금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결과적으로는 특정한 방향으로 결론을 몰고 가기보다 문제의식을 조금 공유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입장이 더 설득력 있는지에 대해서는 세미나 참가자들이나 독자들도 나름의 판정 권한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예민한 문제일 것 같은데요, 지역에서 이와 같은 지적/실천적 탐색 작업을 하는 것이 인적 물적 네크워크상의 애로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역을 사고하자라는 슬로건도 있습니다만, ‘현대사상’이란 큰 주제를 일부러 지역화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고민할 수는 있지 않을런지요?

“지역적 애로점은 주로 『현대사상』을 유통시키는 데 있습니다. 제작비와 관계없이 무조건 권당 정가를 5천원으로 정하고 있지만 판매수익은 거의 없습니다. 필요한 분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드립니다. 홈페이지(denken.daegu.ac.kr)에서는 게재된 논문들을 무료로 받아갈 수 있습니다. ‘copy right’보다는 ‘copy left’가 왠지 더 매력적이지 않던가요.

한때 서울중심주의 혹은 서울대중심주의에 대한 지방(대)의 은밀한 투쟁을 피부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실질적으로 그러한 투쟁을 벌여온 셈입니다만, 명시적으로 이슈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을 싹 무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저는 누구나 이성적 존재라는 계몽사상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영혼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데에 대학서열이나 지역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어 수학 성적 좀 떨어지는 학생들 내면의 폭발력을 믿어 보십시오.”

△ 비판적 담론 생산은 비판적 글쓰기에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의식이 전제돼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지식인 사회에서 비판적 글쓰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현대사상 시리즈도 결국은 비판적 담론의 생산과 수용이란 과제에 헌신하는 것일텐데, 지식인사회의 비판적 담론 생산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혹 그런 방안으로 고민하신 것들이 있다면 궁금합니다.

“사회적 불행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데 비판적 담론이 사라질 수는 없겠지요. 지금의 불행을 넘어서려는 사회적 욕구가 엄존하는 한 비판적 인문학의 존재근거는 견고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지식인사회가 비판적 담론 생산보다 떡고물 나눠먹는 데에 좀 더 신경을 써온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좀스러운 생존논리와 패권주의에 파묻혀 범인류적 미래 대안 모색에는 너무 인색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주도적인 분위기를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삐딱하고 뻣뻣한 자세가 어쩐지 멋있지 않던가요.

비판적 담론 생산을 특별히 활성화할 묘수가 제게는 없습니다. 세미나, 스터디, 콜로키엄 시간 되는 대로 참가하고,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밥 사고, 정규직으로 월급 꼬박꼬박 받는 한 『현대사상』꾸준히 내고, 체력이 따르면 공력을 모아 나중에 보아도 덜 창피한 책 한 권씩이라도 쓰는 정도. 욕심이 좀 많은가요.”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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