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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대 지성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초점] 근대 지성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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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8 13:56:50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란 아이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느끼는 욕망과 적의가 교차하는 양가적인 감정이다.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극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전설에서 따온 이 개념에서 아이는 이성 부모에게 성욕을 느끼는 반면, 동성 부모에게 살의를 느끼면서 불안을 경험한다. 여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버지 살해’라는 대목.

김덕영 한국디지털대 교수(사회학)가 최근 한국이론사회학회에서 발표한 ‘정신분석학과 사회학: 막스 베버의 경우’는 이성과 금욕의 표상으로 간주됐던 베버 이론의 심연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베버가 종교나 에로스 등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냉소를 퍼붓고 대신 합리성의 발달과정과 연관지어 설명하려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런 그의 이력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역설에 가깝다. 모친에 억압적인 부친에 반기를 들어 간접적인 사망원인이 됐던 점, ‘독일제국’을 봉건적 유산계급이 아닌 시민계급의 이상 구현에 헌정하려했던 점 등 가족과 국가의 차원에 걸쳐 베버는 지속적으로 ‘아버지 살해’를 자행했다. H. 스튜어트 휴즈의 말을 빌리자면 “프로이트의 유일한 경쟁자가 ‘오이푸스 컴플렉스’의 전형적인 예였다는 사실은 운명의 장난”인 셈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전통을 소화했고 동시에 부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 벤야민은 혁명적 비평을 위해 테리 이글턴읕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최문규 연세대 교수(독문학)는 “벤야민은 하나의 특정 이념으로 압축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신비적인 카발라주의, 유대적 메시아주의, 무정부주의적 시오니즘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던 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젖었던 그가 아우라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예술의 재현 논리를 설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나치스가 집권한 1933년 파리로 망명, 이후 사회문제 연구소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나치스에 의해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그 역시 한때 포로 신세가 된다. 스페인 국경을 통해 미국으로 탈출하려 했던 벤야민은 입국을 거부당하자 게슈타포에 의한 체포를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베버나 벤야민의 경우가 실제 부친이나 가부장적인 국가를 부정한 사례이지만 자신을 지적으로 성장시킨 스승을 살해한 경우는 무척 많다. 여기서 가장 먼저 언급돼야할 인물은 바로 프로이트 자신의 수제자이자 호적수였던 칼 구스타프 융. 융은 ‘꿈의 해석’이 1899년에 출간되자마자 읽고나서 性에 관한 부분을 제외한 ‘억압기제’라는 가설에 크게 감화된다. 1907년 프로이트를 만난 융은, 제자를 자처하면서 학계에서 쏟아지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을 직접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융이 참을 수 없었던 점은 ‘리비도’라는, 性으로 인간의 욕망이 환치되는 방식의 설명이었다. 1912년 이후 리비도 개념에 반기를 들었던 융은 결국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원형질을 설명함으로써 결국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가졌던 친분도 융과 프로이트의 관계에 비할만하다. 그렇지만 아렌트의 태도는 ‘부친살해’와는 정반대에 가까웠다. 아렌트는 1924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하면서 하이데거와 지적으로는 사제관계를, 인간적으로는 연인관계를 맺게 된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결별하게 되지만 그에 대한 지적 부채나 인간적 신뢰까지도 청산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렌트에게는 ‘노동’이나 ‘작업’ 등과 같은 독창적인 부분도 있지만, 정치공동체에 대한 구속성을 나타내는 측면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짙은 그림자를 엿보게 한다. 하이데거가 만년에 나치스 시절 당원으로 활약하고 모교 총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비판받았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아렌트가 남근적인 독일제국에 복무한 스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지 않았으며 유태인으로서 간접적으로 면죄부를 발행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종의 학문과 이념이 교배해서 하나의 思潮와 學派를 형성하는 것이 흔한 지성계에서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전통’은 그리 생경스러운 것도 남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근대적 이성이 완성되고, 헤겔적인 人倫의 구현과정으로 자부하던 20세기 초반의 독일 속에서, 인류사에 기억할만한 지적 시도가 자신을 길러낸 바로 그 가부장적인 국가의 구성물을 향해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이는 그만큼 서구중심적인 세계관 속에는 자기부정의 필요성이 내재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진욱 기자ato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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