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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예술의 경지 오른 집필가의 삶 ‘아이작 아시모프’
[역사 속의 인물] 예술의 경지 오른 집필가의 삶 ‘아이작 아시모프’
  • 박상준 전문번역가
  • 승인 2010.12.27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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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에 당시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였던 현정준 박사는 『아시모프의 천문학 입문』이란 책을 번역해 내면서 꽤 인상적인 후기를 남긴 바 있다. 처음 원서의 제목 『Asimov on Astronomy』를 접하고는 작가가 무척이나 스스로에 대해 자존감이 높은가 보다 했는데, 실제 책 내용을 보니 천문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우 쉽고 재미있게 서술돼 있더라는 것이다.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필자도 전파과학사에서 나왔던 이 문고판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는 나중에 여러 번 재독하면서 주변 친구들에게도 추천했던 기억이 새롭다. 요컨대 아시모프라는 인물은 참 글을 재미있게 잘 쓰는 사람이구나, 하고 각인된 계기였다고나 할까.
한국에서 아시모프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선 뒤이다. 그의 대표적인 SF소설인 『파운데이션』과 『로봇』시리즈가 줄줄이 번역돼 나왔고, 같은 시기에 그의 교양과학서들과 기타 저작들도 동시다발적으로 선을 보이면서 비로소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종합저술가의 면모가 우리나라에서도 분명하게 인식된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1920년 옛 소련에서 태어나 3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성장하며 10대 때부터 단편 SF소설을 집필해 잡지에 투고했다. 이렇듯 그의 경력은 SF작가에서부터 시작됐다. 15세에 컬럼비아대에 진학해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보스턴대 생화학 교수로 일하면서 종신재직권을 얻기도 했지만,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30대 후반에 가르치는 일을 그만둔다.

그로부터 아시모프는 1992년에 72세로  고할 때까지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매진했다. 다른 취미나 잡기도 없이 그저 글 쓰는 것만이 낙이라고 본인이 공언했을 정도다. 그가 낸 책은 500여 종에 이르며, 미국의 도서관 장서 분류체계인 듀이 십진법의 10가지 범위에서 단 한 분야, 100번(철학,심리학)대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1940년대에 SF작가로서 처음 데뷔한 뒤 곧 확고한 위상을 세웠지만, 1960년대부터는 창작을 사실상 그만두고 논픽션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시모프는 전방위적인 저술가이자 베스트셀러 필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이 글 처음에 소개했던 『Asimov on Astronomy』라는 책 제목도 사실은 출판사들이 원한 것이었다. 아시모프는 이런 식으로 과학의 모든 분야는 물론이고 신화나 성서까지도 자신의 스타일로 쉽고 재미있게 해설하는 책들을 냈다.

1980년대에 들어 아시모프는 다시금 SF 창작을 재개한다. 그동안 자신이 SF작가로서는 시대에 좀 뒤졌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오랜 팬들의 요구와 성원에 기운을 얻어 다시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내놓은 SF소설들은 큰 성공을 거두면서 거장의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아시모프의 SF는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공지능 분야에서 이른바 ‘로봇공학의 3원칙’으로 일컬어지는 내용이다. ‘1. 로봇은 인간을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 2. 로봇은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3. 로봇은 1,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로 요약되는 이 원칙은 오늘날 관련 분야의 국내외 학자들이 연구에 주요하게 고려하는 하나의 기준이 됐으며,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이나 ‘아이, 로봇’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아시모프에게는 ‘집필가(writer)이지 예술가(artist)는 아니었다’ 라는 냉정한 평가가 붙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집필가로서의 업적, 또 그가 보여준 삶은 그 자체로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사후 20여 년이 가까워오면서 그의 논픽션들은 차츰 빛이 바래고 있지만, SF작가로서 발휘했던 놀라운 상상력은 여전히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 아카데미의 영역을 넘어서 모든 독자들과 소통했던, 아시모프와 같은 인물을 다시 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박상준 전문번역가

‘서울 SF 아카이브’,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대표로 있다. 『화씨451』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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