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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역사 속의 인물]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 안재성 저술가
  • 승인 2010.12.20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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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해방직후 세워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에게는 늘 비운의 혁명가라는 접두어가 붙는다. 일제 때부터 항일 공산주의 혁명가로 널리 알려져 해방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월북 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기 때문이다.

격정의 20세기가 열리던 1900년 5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박헌영은 경성고보 시절 삼일만세운동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해방되기까지 26년 간 오로지 항일투쟁에 헌신한다. 삼일운동 이듬해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조봉암 등 선배운동가들의 지도로 공산주의자가 된 그는 이듬해 결성된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의 비서로 활동하다 체포된다.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주도하다가 또다시 체포돼 다시 2년여의 감옥살이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이때 정신병으로 위장하기 위해 자신의 똥까지 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석방된 그는 소련 모스크바로 건너가 공산당 고급간부 양성학교인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상해에서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함께 1939년까지 다시 6년여의 감옥살이를 한다.


세 번에 걸친 체포와 재판 소식은 매번 신문지상에 상세히 보도돼 조선인 지식인이라면 박헌영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첫 부인인 주세죽과의 결혼 소식까지 신문에 날 정도였다. 해방직후 지식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지도자감으로 이승만, 김구, 여운형에 이어 박헌영이 꼽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석방되자마자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수배당한 상태에서 전라도 광주의 벽돌공장 인부로 은신하다 해방을 맞은 박헌영은 곧바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책임자가 되고 이듬해 좌파연합으로 결성된 남로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한다. 그러나 미소의 냉전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혹독한 탄압을 당하면서 해방 1년 만에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한 박헌영은 북한 땅 해주에 거점을 두고 이후 수년 간 남한의 무장빨치산투쟁을 지원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무렵 ‘박헌영이 전쟁을 선동했으며, 전쟁 중에는 미제의 간첩으로서 미국에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체포돼 처형된다.

북한은 제주도의 4.3 무장봉기와 여순반란으로 남한이 이미 내란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남한정부가 수차례나 대대급 병력을 동원해 38선 이북을 공격해왔다는 점에서 북침에 대한 응전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이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이란 점도 명백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고문서보관소의 기밀문건들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수차례나 스탈린과 모택동을 방문해 전면전을 허가,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헌영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정부 수립을 주도했던 소련교포들은 소련으로 돌아간 후 남한의 기자들에게 박헌영이 간첩이 아니며 누명을 썼을 뿐임을 거듭 증언한다. 그럼에도 북한의 재판기록만을 읽은 이들은 박헌영 간첩설을 아직도 믿는다. 소련식 사회주의가 초라한 성적표를 낸 채 붕괴하고, 북한정권의 오류도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오늘날, 박헌영이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동조했다고 해도 잘못이라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끝까지 소련과 북한의 지도부를 믿었고, 그럼에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으니 비운의 혁명가가 된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박헌영의 시대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한국전쟁 발발 전에 김일성과 이승만은 똑같이 사흘이면 통일을 할 수 있다고 전면전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고, 김일성은 석 달을 두고도 부산까지 진격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압록강 너머로 도망쳤다가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서야 돌아온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반성이라곤 모르는 채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김일성은 박헌영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다.

연평도 사태 이후 냉전으로 치닫는 남북의 정세를 보면서, 남북 지도자들의 무모한 허세를 보면서, 죽은 이승만과 김일성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안재성 저술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동조합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지은책에는 『박헌영 평전』 등이 있다. 인권과 역사에 관한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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