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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재단 학술지원 30년의 힘 … 학문의 자생력을 묻다
대우재단 학술지원 30년의 힘 … 학문의 자생력을 묻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12.20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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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학술총서 600권째 『우리 학문이 가야할 길』 발간

대우학술총서 600권 째가 이번 주 발간된다. 『우리 학문이 가야할 길』(아카넷)이다. 이 책은 한국학술협의회(이사장 김용준)가 떠들썩한 축하행사 대신 선택한 ‘좌표 찾기’ 작업의 의미가 짙다.

2009년 6월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태수(인제대), 김광억(서울대), 김두철(고등과학원) 교수와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기획을 구상했다. ‘대담: 우리 학문의 현황(김광억, 김두철, 이태수)을 비롯 문학, 역사, 철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의학 등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대담이다. 중진 학자들이 학문의 가야할 좌표를 언급한 대목이 솔깃하다. 이들의 대담 중 ‘우리 학문의 현주소’ 부분을 발췌했다.

이태수: 우리나라에서 논의하는 학문은 대개가 우리 전통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자생적인 학문이란 것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학문에 독창적인 또는 자생적인 부분이 웬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문제가 나올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김광억: 학문연구의 중심-주변의 문제는 학술용어를 비롯한 사용하는 언어, 분석의 방법과 서술의 형식, 그리고 주제의 유행이라고 할까 주류를 결정하는 힘의 소재, 참고되는 사항의 출처 등등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현대 학문의 현실적 존재양상을 보면 중심적 위치를 점하는 학문분과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한국학이나 국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에도 그 종사하는 학자들께서는 서운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광억: 19세기까지 우리에게 학문의 중심지는 중국이었고, 개념과 용어와 서술에 사용되는 언어는 당연히 중심부의 언어인 한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학문의 주변부에 있으면서도, 중심부의 학문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는 학문의 중심부냐 주변부냐를 따질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글시대입니다. 한글세대가 주된 세력을 이루면서 이제 소위 동양학 연구도 중심-주변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우리의 동양학 연구가 주변부화 되기 시작한 것이겠지요.

물론 서양을 주제로 삼는 학문 영역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조금 낫기야 하겠지만요. 한글전용의 세대가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들어서서 동양학 문헌자료를 다룸에 있어서 번역의 문제가 심각하게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한문으로 된 문헌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자유롭고 독창적으로 해왔던 학문 분과가 이제는 번역물에 의존해서 연구해야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원전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해독 능력이 충실하지 못하니 결과적으로는 중심부의 학자에 의해서 한번 걸러진 연구에 의존하는 경향이 증가됩니다. 동양학 뿐 만 아니라 서양에 대한 학문연구도 우리에게는 마찬가지입니다.

서구의 고전 ‘원전’이라고 하는 문헌을 직접 해독할 수 있는 인력이 극히 적으니 우리말로 번역돼야 하는데, 그 번역조차 적시에 충실하게 이뤄지지 않으니 원전보다 이에 대한 해설이 먼저 소개되고 있습니다. 뿌리는 모른 채 원예사가 다듬은 꽃이나 잎만 보는 셈이지요. 원전이 제대로 번역돼 있어야 우리가 학문에서도 주변부의 위치에 갇히지 않고 또한 자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원전 번역과 학문 주변부의식 극복

이태수: 지난 50년 동안, 학문의 주변부에 있던 우리는 학문의 중심부를 서구로 설정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학문이 서구 학문에 편입이 되면서, 번역 문제가 심각하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어떤 분야든지 일단 중심부 학문의 수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게 그동안의 학문 활동이 아닐까요. 따라서 학술 번역, 학술 용어 문제라는 게, 서구에서 수입한 학술 개념들을 우리의 학문과 문화와 같은 우리 것 안에다가 조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게 모든 분야의 학자들에게 언급이 될 만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광억: 원전 번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폐해가 우리 학계에 만연해 있다고 봅니다. 학계에서 보면 동양학이든 서양학이든 모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서구 학자들의 연구서들이 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학문에서 국경이 없고 또 연구결과가 시공간을 초월해 교류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우리가 원전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없이 이러한 연구서들을 연구의 대상이자 ‘원전’으로 삼게 되니 간접적이고, 또한 연구자의 독창적인 입장에 의해 걸러지고 해석된 부분 혹은 수준에 머물게 될 뿐이지요.  

이태수: 그것도 결국은 우리가 학문의 중심부에 있느냐 주변부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학문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겠지요. 간혹 ‘학문의 식민지’라는 말을 듣는데, 이는 너무 선정적이고 과장된 표현으로 들립니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분을 꼭 학문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학문의 중심부와 학문의 주변부라는 구분도 분야에 따라 조금씩 상황이 다르겠지요.

제가 속한 철학 분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요즘 등재지의 학술논문 심사에서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가 그 논문에 얼마나 국내 학자의 글을 인용했는가를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철학 연구도 전반적으로 주변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 그것을 벗어나려는 의식이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학문을 하면서, 우리는 주위의 동료들의 글보다는 중심부에 속해있는 외국 학자들의 글을 읽어왔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학문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학문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쓴 논문에서 나와 가까이에 있는 동료들을 심층적으로 논의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나와 멀리 떨어진 서구 학자들의 생각을 따졌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제대로 된 학계가 형성돼 있는지를 물을 수 있겠지요.

일본 자연과학의 배경 주목해야

김두철: 그렇게 본다면 실은 자연과학에서도 뚜렷하게 의식은 하지 않아도 주변부-중심부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학문의 저변이 두텁지 않다는 점과 바로 연결이 됩니다. 아직 국내의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외국 유학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외국에서는 아무리 좋은 연구를 했더라도,  국내에 들어와서는 같이 일할 비슷한 분야의 연구 인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연구자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계속해서 주로 외국의 연구자들과 학문적 끈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국내 학자들 끼리 모여서 같이 일해서 하나의 분야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야 되는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혼자 노는 모양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국내에서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해 중심부의 일부로 편입되기보다는, 주변부의 역할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이점에서 일본의 경우와는 정확하게 대비됩니다. 일본은 서구와 비교해서도 자연과학의 저변이 두터운 편입니다. 바로 이게 일본 출신의 학자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몇 년 전에 보았듯이 나고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 학자가 교토 대학의 박사후 과정에 가서 1973년에 썼던 논문이 2008년에 와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학계와 사회가 부러워하기만 했지, 이런 현실적 배경에 주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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