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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 새로운 소통채널에 익숙해져야 … 폭넓은 교양 필요”
“연구자들, 새로운 소통채널에 익숙해져야 … 폭넓은 교양 필요”
  • 교수신문
  • 승인 2010.12.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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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대담] 퓌마롤리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vs 전성기 한국불어불문학회장

한국불어불문학회(회장 전성기 고려대)가 지난 10일부터 이틀간 고려대에서 주최한 ‘21세기 동북아시아에서의 불어불문학 연구 : 쟁점과 전망’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프랑스 학자 가운데 단연 돋보인 학자는 마크 퓌마롤리 교수였다. 전성기 학회장이 퓌마롤리 교수의 방한에 맞춰 그와 이메일 대담을 나눴다. 주제는 글로벌 시대의 불어불문학 연구의 의의, 인문학 위기의 대처방안, 그리고 수사학을 비롯한 고전연구의 현재적 의의 등이었다. 

 

마크 퓌마롤리(Marc FUMAROLI)는 누구인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석학으로 1932년 6월 마르세이유에서 출생, 릴 대학과 파리 소르본 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외젠 이오네스코에 이어 199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됐다.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 교수이며, 프랑스문학사학회 회장이다. 국제수사학사학회 창립자(1977)이기도 하다. 『웅변의 시대』(1994), 『영웅과 웅변가』(1990), 『문화국가』(1999), 『정신의 외교』(1995), 『근대유럽의 수사학사』(1999), 『언제 유럽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는가』(2001), 『샤토브리앙. 시와 공포』(2005), 『17~18세기 회화와 권력』(2007),『빅뱅과 그 이후』(2009) 외에 근대 프랑스와 유럽의 지성을 다룬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있다. 현재 『문예 공화국 (15~18세기)』과 기독교 이미지에 대한 저서를 준비 중이다

Q1. 한국불어불문학회가 주최한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21세기 동북아시아 불어불문학 연구 : 쟁점과 전망>입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일본, 중국, 대만 등 5개국 연구자들이 참가한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 제가 이번에 참석하게 된 것은 동북아시아 연구자들과의 연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술대회가 동북아시아에서의 불문학의 장래를 생각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시점에 개최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학술대회 주제는 현재의 위기 상황 속에서 아주 적절하게 선택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프랑스 문학사 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저의 의무이자 역할이기도 합니다.

 

Q2.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에는 동북아시아의 불어불문학연구자들 사이의 상호교류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런 교류가 현재 위기를 맞고 있는 불어불문학연구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저는 오늘날의 소수 집단들 - 불문학 교수들도 소수 집단입니다 - 이 서로 간의 교류를 더 확대하고 연대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좀 더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술대회라는 형식은 고전적 형식입니다. 그것은 친목을 도모하고 애정을 가지고서 협력을 도모해나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분명히 언급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또 다른 형식의 연대방식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방식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을 통한 상호교류입니다.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 중 하나가 우리가 고전적인 방식들로만 스스로를 방어해 왔다는 사실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 잃어버리는 것들이 이미 새로운 소통채널로 옮겨가고 있는데도 말이죠. 따라서 우리 연구자들도 사이버 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성장해야만 합니다.

 

Q3. 선생님께서는 저서 ??언제 유럽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는가??에서 프랑스어의 가치를 소개하셨습니다. 어떤 점에서 프랑스어가 지식인의 언어로서 중요한 것입니까?

- 저는 정말로 프랑스어가, 다른 어떤 것보다, <지식인들의 언어>이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지식인>이라는 개념 자체, 즉 확신과 재능을 가지고 대중의 토론들에 개입하는 참여 작가의 개념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한줌도 되지 않는 지식인들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또 다양한 여러 전문가들의 것도 아니죠. 비록 프랑스어가 수많은 전문분야, 특히 순수과학이나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을 선도했을지라도 말입니다. 프랑스어는 교육의 언어이고 (정원을 가꾼다는 의미에서) 교양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과정은 섬세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만드는 것과 같지요. 그러한 것은 누구나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위해 어떤 전문 분야를 선택하든지 간에요. 프랑스어 - 그리고 이 언어가 이끌어낸 위대한 문학 - 는 인생이란 것이 그날그날의 생존이나 비지니스로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언어란 내면의 개화와 개인적 모험의 길을 열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어는 그 기능을 해왔습니다. 그렇다고 이 언어가 유럽과 아프리카, 북미 대륙과 아시아에 퍼져 있는 프랑스어권 공동체 내에서 소통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프랑스어는 소통의 언어이자 우리가 스스로를 열어보이게끔 만드는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4. 오늘날 한국에서는 프랑스어와 같은 제2외국어는 점점 도태되고 있습니다. 영어를 중시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이로 인해 불어를 외국어로 선택하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어불문학 교육 차원에서 보면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해결할 방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물론 우리는 지금 일종의 영어 쓰나미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영어는 비지니스 언어이고 마케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비지니스와 마케팅에 사용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표현하는 언어이지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실용적이고 유용하지만 또한 빈곤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거대한 파도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인간 존재란 것이 비지니스와 “일자리”, 그리고 “대중경영”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층 더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생산과 소비라는 두 축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와는 다른 차원 위에서 살기를 열망하고, 타인들과 대화하기를 바라며, “돈으로 살수 없는 그 무엇”을 갈망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자본의 시장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이런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들이 있다면,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이 다른 어떤 서양 문학들보다도 유교철학과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훨씬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프랑스어와 문학은 교리문답이나 도그마, 종파주의, 이데올로기, 출세의 도구 등을 제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적 성숙과 개인들 간의 대화 훈련을 제안하며 인생에 소금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Q5. 실제로 한국에서는 불어불문학 연구나 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대중의 취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의 취향을 따르다보니 연구의 불균형 현상이 발생하고 연구의 수준 역시 심화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닐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경향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요?

- 당신이 한국에 대해서 말한 것들은 불행히도 프랑스에 그대로 해당됩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들려는 생각에서, 사람들은 언어의 습득과정을 신문이나 유행잡지의 독서에 연관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취향과 스타일을 형성해 줄 아름답고 쉬운 텍스트들은 감춘 채 말입니다. 이런 교육적 선동행위는 황폐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국이 이런 길을 쫓는다면 똑같은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어는 절대로 “글로비쉬(만국통용영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어를 배울 때는 페로의 동화, 라퐁텐의 우화,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몰리에르의 희곡들도 동시에 배우고 읽어야 합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일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속어나 말장난, TV용 프랑스어 같은 것들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만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시적인 은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리두기가 필요하고 한 걸음 물러나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Q6. 종종 문학 연구가 숫자를 중시하는 경제논리에 따라 진행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수치화되고 정량화된 기준에 의해 인문학 연구를 평가하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이런 현상은 요즘 어디서에도 그리고 유럽에서도 관찰되고 있습니다. 수량과 양적인 것이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것들이 편리한 기준들을 마련해 줍니다만, 그러한 기준들이란 계산이 가능한 물질적 이익 말고는 다른 판단력이나 재능도 없는 관료계층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관료계층에 대항해서, 그리고 그들의 천박한 판단 기준들에 대항해서 민첩하고 명민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은 시대적 불운에 대해 불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비록 슬픈 현실이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껴안습니다. 저는 무술과 문학 사이에는 심오하고 비밀스런 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문학이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권력들에 맞서서 아무리 그것이 폭압적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대처를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Q7.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불어불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어떻게 이를 대처해야 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인문주의 교육의 필요성을 어떻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저는 문학교육을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과 같은 인문학의 분야들과 혼동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문학교육이 이런 학문들이 다루고 있는 영역들을 더 세분화할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문학은 독자들의 상상력과 감수성, 취향이나 도덕성, 예절이나 지성을 ‘가꾸어주는’ 허구적이거나 가상적인 경험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교육이 오늘날에는 가장 결핍되어 있습니다. 상업적 시장을 겨냥한 그 어떤 섣부른 전문화도, 넘쳐나는 그 어떤 상업적 오락물들도 이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박탈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힘들어해서는 안 됩니다. 생산과 소비라는 이 빈곤함 앞에서 자유롭고 깨어있는 인간 존재의 충만함을 내세울 필요가 절실합니다.

 

Q8. 국가주도의 문화진흥정책이나 연구진흥정책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를 들어,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국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사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행정적인 기준에 맞추어야만 하는 까닭에 연구가 한시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자율적인 연구수행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저 역시도 관료적인 기준의 경직성과, 그들이 연구자의 재능이나 인물됨보다는 사업의 외양을 더 중시하고 선호하는 속성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는 관료적 시스템을 직관적이고 대담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별수 없이 외적인 성과에 연구비를 지불하고, 그 방향으로 한층 더 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인문학연구자들은 가장 풍요롭다고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길로 똑바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Q9. 현재 한국의 대학은 구조조정의 풍파를 맞아, 학과가 통합되는 등 여러 가지로 불안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흔히 학제간 융합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전문성을 경시하거나 포기하게 만들고, 자연히 전문적 연구나 교육자의 양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의 전문성은 유지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전문성과 전문화의 개념은, 제가 앞에서도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들의 한 부분입니다. 관료계층과 자연과학에서는 비록 그것이 아직 미숙하고, 극히 협소한 분야일지라도 전문화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프랑스문학은 그것을 이해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교양을 요구합니다. 이런 교양이 없이 특정작가나 시기 혹은 장르를 연구한다면 종국에는 메마른 수확 말고 다른 것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편협하고 과도한 전문화란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다른 세계로 쉽게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온갖 방법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발자크를 이해하고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역사가이자 풍속연구가이면서 동시에 서술 전략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프루스트를 이해하고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예술과 음악에 대한 교양을 습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Q10. 대학의 구조조정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새로운 미디어 매체의 등장을 생활 전반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매체의 환경 속에서 고전문학의 위상이 위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과연 고전문학의 가치, 즉 인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오늘날의 교육이 더 이상 가족이나 학교가 아닌 오락과 게임과 광고로 넘쳐나는 수많은 화면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것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또 원칙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부여된 소위 “이성적 선택”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전해주는 콘텐츠들은 소비자들의 기억과 상상력 그리고 판단력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미지를 파는 사람들은 사업이 가져올 심리적 결과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그 자체가 인간의 내면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자아’의 움직임을 축소시켜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산업혁명 이전의 문학, 특히 고전 프랑스문학이 오늘날 광고와 대중문화에 지친 영혼들에게 또 다시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고전문학은 당시의 작가들이 자기시대에 부여했던 치유적이면서도 해방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줍니다. 고전작가들은 관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노장사상이나 유교사상처럼 이들은 건강하고 균형있는 정신과 육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고대철학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세상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듯이 이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원칙을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고전작가들은 감동과 미소를 주는 허구에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독자나 관객들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시각예술과 음악에 호소했습니다. 현대세계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시와 문학, 그리고 예술 속에서 모든 ‘고전적’인 것의 가치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현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비지니스나 마케팅에 집요하고 처절하게 매달리고 있는 이 불행한 현상에 균형이 되어 줄 심리적 추를 구해주게 될 것입니다.

Q11. 고전문학을 통해 인간 정신의 자유가 지닌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17세기 지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은 신구논쟁 역시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연구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17세기 신구논쟁의 현대적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사실, 17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신구논쟁’의 두 진영은 서로 본질적인 점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동교육에 대해서입니다. 고대파는 아동교육이 시나 문학, 예술과 같은 것으로 시작되어 아이들의 표현력과 기억력, 상상력과 감수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대파는 일종의 수학과 과학 그리고 물리학의 분석을 통해 환상이나 지나친 상상력을 이성으로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신구논쟁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처럼 아동과 청소년의 교육과 관련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두 진영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없습니다. 한쪽에는 교육보다는 모든 분야의 전문화, 소비자들을 조작하는 글로벌 대기업의 상표가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국가차원의 관료주의가 그들의 만족을 얻어내려고 애쓸 것입니다. 다른 쪽에는 이 질식당하고 메말라 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외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외침은 고대 아시아 각국의 인간들이 실제로는 이들보다 더 늦게 근대적 정신을 갖게 된 고대 유럽의 인간들 (프랑스가 이에 해당합니다)과 함께 주장해 왔던 바로 그런 호소, 즉 지혜와 아름다움에 대한 호소를 통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대의 신구논쟁은 자본과 지혜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대립이 될 것입니다.

Q12. 선생님은 ??웅변의 시대??라는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저서에서 수사학이 17세기의 정신적 배경에서 중요하게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수사학의 기능과 역할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 수사학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은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과 행동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설득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설득을 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지적한 능숙한 속임수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소피스트적 설득은 광고나 대중오락 같은 것 뒤에 숨어 있습니다. 이런 설득은 고대 수사학 기술의 문채나 전략을 사용하며 기술적으로 세련된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설득이란 또한 조언을 주고, 보듬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즐겁게 만들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설득의 기술이 없다면 그 어떤 의사나 예술가, 정치인도 자신들의 환자나 독자, 관객이나 시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수사학은 장사를 하는 자들이나 문학교수나 작가나 예술가 등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공간’입니다. 따라서 수사학은 여전히 그 무한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Q13. 끝으로 한국의 불어불문학 연구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우리시대의 영웅들에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첫 번째 조언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의 잠재적인 적들에 대항해서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의 무기들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사회적 망으로 구성하고, 여러분들을 이미 유럽과 미국에 존재하고 있는 놀라운 망들에 연결시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언은 프랑스문학을 하나의 전문분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어느 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놓치지 말고, 전체의 궁극적인 목표, 즉 자기 자신의 경험과 세상의 경험을 증대시킨다는 그 목표를 절대 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세계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오랜 계보를 무시하고 가장 최근에 나온 최신기계를 성급히 소비하는 존재로 축소되어 버렸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시야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시야를 함께 가져야만 합니다. 다행히도 프랑스문학 교육과 연구는 그런 시야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교육과 연구는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읽어내고 우리의 세계를 때로는 아이러니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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