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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책의 형식성 이전에 존재했던 기원적 경험을 찾아서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책의 형식성 이전에 존재했던 기원적 경험을 찾아서
  •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영미문화이론
  • 승인 2010.12.06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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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글은 詩의 문제였다. 일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장르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야 시를 여러 ‘문학’ 장르라고 부르지만, 고대에 시를 썼던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시는 곧 세계를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의 구분처럼 문학은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문학의 민주주의 속성은 내용에서 그렇다기보다 형식의 논리에서 발현된다. 민주적인 내용을 ‘재현’하기 때문에 문학이 민주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의 형식성이 곧 평등주의의 구현인 셈이다.

문학 이전에 존재했던 것은 그냥 글이었다. 이런 글의 개념은 문학으로 포섭되지 않는 ‘다른 글쓰기’를 의미한다. 글쓰기가 곧 문학일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런 글쓰기는 과거 ‘문예(belle letters)’라고 불리던 교양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주류적인 형태는 아니다. 문학이라는 글쓰기가 우리를 지배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이런 유형의 글쓰기는 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우주의 체계를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기도 했다.

시는 바로 이런 직접적 체험의 재현을 목표로 삼는 글이었다. 산문이 아니라 시를 쓴다는 것은 예언가의 자질이었고 특권이었다. 단테는 이런 예언가로서 기능하던 시인이 산문의 세계로 진입하는 지점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베아트리체를 발견한 곳이 그 어디도 아닌 베키오 다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다리는 당시에 붐비는 시장이었고, 거기에서 단테는 일상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의 진리를 체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책 이전에 이미 나타나는 것은 경험이고, 이 경험을 포획하는 최초의 언어가 詩이다. 시를 담고 있는 것을 오늘날 시집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시는 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책은 시를 사후적으로 담는 ‘집’에 불과하다. 현대의 시인들을 괴롭힌 문제가 시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책에 갇혀 버린 시의 모습에서 현대의 시인들은 상실한 시의 세계를 발견하고 슬퍼했다.

이제 글은 얌전하게 책이라는 집에 앉아 있다. 디자인에 따라서 책의 내용이 달라지는 일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판매와 수익성을 위해서 책은 숱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글을 물질화하고 있는 책은 글의 육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글은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자책의 등장으로 상황이 변화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새로운 책의 형태조차도 충실하게 ‘종이책’의 모양새를 구현하고자 한다. 습속은 질기고 새것은 가볍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동안 옛것에 매달리지만, 대세는 언제나 새것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역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결과 여부에 상관없이 새것은 낡은 것을 이긴다. 그러나 이렇게 이긴 것들이 항상 ‘인간적인 효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원초적 폭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이 강제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대상이다. 시에서 산문으로 글의 중심이 이동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개별적 체험을 그려내는 시가 보편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산문의 인준이다. 이 인준의 문제는 단순한 권력관계였다기보다, 앎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재구성돼왔다. 이른바 우리가 써내고 있는 논문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이 대표적이다. 근대는 ‘문학연구’라는 명목으로 글쓰기의 영역조차도 ‘논증’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논문은 이런 맥락에서 근대적인 논리로 사유의 과정을 포섭하는 과정을 내포한다. 논문쓰기에 매달리면서 오히려 학자들의 현실 개입이 어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대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논리이고, 절차적인 균형과 절제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기치로 내건 공리주의는 훌륭하게 이런 근대의 이념을 체제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책이라는 형식성에 담기기 이전에 존재했을 기원적 경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경험의 복원은 책을 집어던짐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책의 나타남 너머에 있을 행간의 잠재태를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통해 책에 담길 수 없었던 경험을 다시 꿈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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