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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호랑이 새끼와 여우들
[신문로 세평] 호랑이 새끼와 여우들
  • 김대환 인하대
  • 승인 2002.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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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2 20:54:02
김대환
인하대·경제학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아서건, 忍冬草의 고난을 이겨내서건 그들은 호랑이로 다시 태어났다.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합법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받은 靈物로, 갈채와 환호 속에 환한 미소 지으며 밝은 햇살 아래 눈부시게 탄생하였다.

탄생에서부터 그들은 달랐다. 총칼 앞세워 으스스하기만 했거나, 피묻은 호피를 뒤집어쓰거나, 그것을 그대로 물려 받았던 짐승들과는 전연 다른 탄생이었다. 그러나 산천초목을 호령하는 호랑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동안 위세를 부렸던 ‘하나’의 무리를 해체시켰는가 하면, 밤의 호랑이마저 제압하고자 하는 용맹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호랑이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 낳은 자식들마저 호랑이로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잡았거나 인동초의 고난을 이겨낸 것은 그들 자신이지 자식들이 아니다. 응원이나 위로로 도움은 주었다고 하더라도 호랑이로 다시 태어나기에 값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지가 개벽해도 자식은 자식, 새끼는 어디까지나 새끼. 그들이 호랑이가 됐으니 호랑이 새끼임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새끼 호랑이는 결코 아니라. 하는 짓을 보면 더욱 분명한 것이, 힘찬 기상으로 산야를 누비며 먹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어슬렁거리며 썩은 고기나 받아먹고 있으니 호랑이와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다. 부들부들 떠는 쥐 한 마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고양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누가 이들로 하여금 호랑이라는 착각을 하게 했는가. 狐假虎威한 여우 짓 때문에 나라꼴이 우습게 된 것인가. 그랬다면 호랑이의 가면이 있었을 텐데, 그 가면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호랑이의 새끼이긴 하지만 새끼 호랑이는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밀림의 무지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대한민국이 밀림의 나라는 아니다. 오히려 민초들은 호랑이가 아닌, 호랑이의 새끼가 부린 횡포에 치를 떤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까봐 걱정해 온 터였다. 호랑이의 새끼면 무조건 새끼 호랑이고, 새끼 호랑이면 호랑이라는 三段論法을 멋지게 구사하여 私腹을 채우면서 갖다주는 썩은 고기덩이에 현혹되어 착각도 할만하지만, 고기덩이를 만드는 데 가면을 빌려준 것까지 민초들이 용서하지는 못할 것이다.

호랑이가 되기 전에 낳은 새끼들이 호랑이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새끼 호랑이로 키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성장하면서 철이 드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다면 누가 어떻게 키웠건 당사자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키운 자에게 보다 엄중한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 민초들의 오래된 율법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은 경우는, 믿을 자가 없어 자식에게 사실상 힘을 부여함으로써 새끼 호랑이로 키운 장본인이 그 책임을 실토한 바가 있다. 그래서 민초들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호랑이의 자식임에는 틀림없으되 호랑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주지되었지만, 보모를 자처한 자들이 연줄연줄로 위세를 과시하면서 이들을 새끼 호랑이로 키운 것이다. 호가호위한 자들은 물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그 위세를 받아들였거나 한술 더 떠 그것을 다시 이용한 자들도 책임추궁의 사정거리 밖에 두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모들에게만 책임을 다 떠넘길 수는 없다. 가면을 빌려준 꼴이 된 호랑이 새끼가 처벌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면의 형상인 호랑이 자신도 책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키운 자에게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낳은 자의 책임을 면해 주지는 않는 것이 우리네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 호랑이 자신의 허물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더라도 이미 치를 떤 바 있는 민초들이기에 직접 사과 정도로 넘어가 줄 것 같지가 않다. 자신의 허물이 적은 데도 민초들이 더 관대하지 못하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그만큼 민초들은 민초들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호랑이 아닌, 호랑이 새끼를 새끼 호랑이로 이용해 먹은 자들만이 여우가 아니다. 아직도 호랑이 주변에는 진짜 호랑이의 가면으로 호가호위하는 여우의 무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민초들은 잘 알고 있다. 이 무리들은 公私를 혼동하거나 사를 가지고 공을 부리는 자들이다.

이 참에 호랑이보다 노회한 여우 사냥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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