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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는 신이고, 비상사태는 기적이다”
“주권자는 신이고, 비상사태는 기적이다”
  • 홍철기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 승인 2010.11.29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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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칼 슈미트 지음, 『정치신학-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김항 옮김, 그린비, 2010.10)

정치이론이나 정치철학과 달리 ‘정치신학’은 우리에게 정치의 본질을 보는 관점으로서 전혀 친숙하지 않다. 갈등과 그에 대한 조정을 주제로 삼는 정치와 기적과 계시에 대한 믿음을 주제로 삼는 신학 사이에 어떤 인접성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우리의 상식이나 근대적인 지적 규범에 기대어 볼 때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여파, 그리고 유럽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에 의해 과잉결정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에 직면해 독일의 파시스트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법의 권위와 정당성의 원천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주권자란 예외상태[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명제의 형태로 던져진 물음이다. 예외상태란 기존의 법질서가 해소할 수 있는 위기의 최종적인 한계를 나타내는데, 로마공화정에서는 이 한계지점을 ‘iustitium’이라 불렀다. 至點(solstitium)이 하늘에서 태양고도의 한계지점을 나타내듯 법에도 그와 같은 극한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예외상태란 현행 법질서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지점을 나타내며 바로 그 때문에 법적 권위의 궁극적인 토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의 핵심은 법의 권위가 결코 순수하게 법(학)적으로 규명될 수 없으며, 순수하게 사회학적이거나 정치적으로 밝혀질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법이 법실증주의나 규범주의 법학이 생각하듯 법의 최종적인 권위도 순수하게 법에만 의존해야 한다면 법은 극도의 형식적인 것이 되거나 법은 아예 동어반복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결정하는 최종심급은 정치사회학에 의해 규명된다고 할 수도 없다. 법이 순수하게 정치에만, 정치적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법은 잠재적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와 같은 극도의 무질서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신세가 될 것이다. 궁극의 법적 권위의 소재지를 묻고 확인하게 되는 예외상태와 같은 한계의 경험에서 어느 쪽도 믿을 만한 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법의 권위와 예외상태의 경험

여기서 슈미트는 주권자에 호소한다. 다시 “주권자는 예외상태를[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그는 지금이 예외상태 여부인지를 결정하는 동시에, 만일 예외상태라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즉 어떤 조치가 내려져야 하는가를 결정한다. 예외상태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은 법조문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가 단행돼야 하는가는 내용상 법률로 미리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주권자의 (통치)행위는 법에 속하기도 하고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극한에 다다른 개념’, 혹은 ‘한계개념’의 영역에 속한다. 주권자는 법의 한계지점에서 법학이 배제한 예외상태를 전제로 하면서 법의 형식을 띠는 결정을 내린다. 헌법이라는 ‘기계는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有는 결코 無에서 자동으로 산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로부터(ex nihilo)의 신의 창조를 기다린다.

 

그리고 주권자는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정확히 홉스의 표현에 따라 ‘지상의 신(Mortall God)’, 즉 언젠가 죽을 운명의 신이 된다. 그래서 슈미트는 주권자 또는 국가가 신학에서의 신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유비관계에 있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의 기적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치신학의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치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지상의 신으로서의 주권자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의 최후의 전쟁을 예견하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나치 부역’에도 불구하고 주목받는 이유

정치와 신학의 인접성, 즉 권위란 합리적 동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복종의 대상이고 따라서 믿는 자, 혹은 복종하는 자(친구)와 그렇지 않은 자(적) 사이의 차별과 갈등, 투쟁의 가능성은 슈미트의 정치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슈미트는 나치정권에 대한 부역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전지구적 전환기에 가장 주목 받는 정치철학자(혹은 정치신학자)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전지구화가 적의 개념을 폐지하고 영구평화를 성취하기는커녕 테러리즘이라는 더욱 강력하면서도 그 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적의 형상을 불러내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시민들 자신이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주권자의 권위를 믿지 않는 자)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에서 슈미트를 읽는다는 것은 이미 급박한 지적 과제가 됐다.

나치정권의 어용 헌법학자로 알려진 슈미트에 대한 현대정치철학자들의 관심은 그가 대변하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성격과 직결돼 있다. 영미 정치사상학계에서 슈미트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샹탈 무페는 위기에 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내재적 대안을 사고하기 위해 ‘슈미트와 함께, 슈미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슈미트를 단순히 친구로 환대하든, 혹은 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든 간에 슈미트가 제기한 정치적인 것, 즉 정치의 조건으로서의 친구와 적의 구분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었다. 또한 무페와 함께 슈미트에 대한 폭넓은 지적 관심을 촉발시킨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 저서들, 특히 ‘호모 사케르’ 개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연작은 그 자체로 『정치신학』에 대한 매우 엄밀한 주석이자 가장 핵심적인 비판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 책을 포함한 슈미트의 저작들에 관한 상당히 꼼꼼한 독해의 증거들을 보여준다.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도 슈미트와의 대결을 자신의 정치철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스피노자에 대한 매우 독특한 해석에서부터 『제국』에 이르는 이론적 행보도 슈미트 헌법학의 핵심인 ‘제헌권력’ 개념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는 ‘정치’와 ‘공안’의 구분 등도 결국은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나 에티엔 발리바르가 새로 출간된 슈미트의 『토마스 홉스의 국가이론에서의 리바이어던』(1938)의 프랑스어 번역본의 서문을 손수 썼다는 사실도 급진민주주의 이론가들과 현대정치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슈미트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제시하고 이후 『탈정치화와 중립화의 시대』(1929)에서 전개한 이른바 ‘개념사회학’의 방법론은 특히 개념사 연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당대의 지배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나 개념의 구조가 지배적인 통치의 형태와 동형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사고가 당대의 정치-형이상학적 논쟁과 갈등의 구도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슈미트의 입장은 이후 독일의 헌법사 연구나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의 개념사가들의 방법론에 실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코젤렉의 중심 연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위기’ 개념의 역사였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홍철기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필자는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을 연구해왔다. 옮긴 책으로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등과 지은 책으로는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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