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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퇴행 부추기는 학술지 등급 평가
학문의 퇴행 부추기는 학술지 등급 평가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0.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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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 박석무, 이하 학진)이 교육부의 의뢰로 실시한 학술지 등급평가 결과를 두고 학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BK21 대상 학문분과 위주의 평가와 학문의 특수성을 무시한 평가방식의 채택으로 처음부터 논란은 예견되고 있었다.

대규모 학회에 유리한 평가기준

실제 이번 학술지평가는 모학회 중심으로 이뤄져, 소규모 학제간 연구나 학문적인 실험이 평가받을 수 없는 구조이다. △학술지의 전문성(종합학술지-5점, 영역학술지-4점, 장르학술지-3점) △회원의 전국성 △발행기관의 규모 및 전문성 △학술지 간행 분량(면수) 등의 기준은 규모가 크고 연구분야가 넓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학진이 제공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영역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군소학회가 난립할 때는 학술활동의 편협성이나 폐쇄성이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고답적인 학문연구에 권위를 더해주는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문학 분야를 비판한 김병욱 충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젊은 학자들이 ‘발전적 해체’를 주장해온 ‘국어국문학’은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조차 논문게재를 기피하는 학술지”라며 “여기에 실리면 A급 논문이 된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김 교수는 “학술적 권위란 외부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며, “분명히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는데 그것을 강요한다면 학문적인 폭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학술지의 폐쇄성을 용인하는 것 역시 비슷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김영민 한일대 교수(인문사회학부)는 “학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오늘의동양사상’이나 ‘철학과 현실’같은 잡지가 낮은 등급을 받았다”며, “학회원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잡지만 최고로 인정하는 등급부여라면 우리학문발전에 긍정적 기여는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교수 개인의 연구독려와 나아가 국내학문의 향상을 위해 시행한 학술지 평가사업이 오히려 학문의 퇴행현상을 낳는다는 것이다.

학문의 특수성 무시한 일률적 평가

철학 분야의 평가작업을 맡았던 이영호 성균관대 교수(철학과)는, “양적평가는 왜곡의 가능성이 많고 내실있는 평가가 되기 힘들다”며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질적평가를 강화하는 것이 선결요건임을 밝혔다. 화학공학 평가위원 장호남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역시 “공학 분야는 학술지 게재만으로 학문활동을 평가할 수는 없다”며 학문의 특수성을 무시한 평가잣대의 일률성을 지적했다. 김진일 성신여대 교수(생물학과)에 따르면 “한국학관련 분야도 이 기준에 의하면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SCI 등재여부가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자료로 학회들이 제출하는 자료를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학술지등급결과가 발표되기 직전인 지난 1일 개최된 ‘학술지평가의 발전방향’이라는 한국학술단체연합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학술진흥재단에 제출하는 서류에 일부 학회들이 규모를 부풀리기 위해 막대한 행정력을 동원해 허위기재를 일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학술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활용되려면 그 기준과 내용이 세분화되고 질적평가에 치중해야 한다는 학계의 불만이 결정적인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평가위원들이 학진에 건의한 문제점은 “역사가 오래되고 지령이 오래된 학회지는 많이 알려졌고 수록된 논문도 많기에 자연히 인용빈도수가 높게 나타나므로 논문의 질을 인용빈도수로 등급화하는 것은 편법에 불과하다”는 것과 “기념논문집과 대학연구소 논문집도 업적평가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학술지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부여받은 학회는 앞으로 2, 3년간은 학진의 연구비지원에서, 논문을 게재한 교수는 업적평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어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인터뷰 평가 참여한 장호남 KAIST 교수

"정량적 분석에 그친 평가 공정성 시비 일 것 분명”

△화학공학 분야의 학술지선정과 평가위원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서울대, 포항공대, KAIST, 광주과학기술원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학술활동을 하는 학회에서 발간되는 37개의 학술지를 대상으로 삼았고, 평가위원도 위의 4개 대학 학과장, ERC 소장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학술지등급평가의 한계는.
“너무 ‘정량적’이다. 내가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포스트 SCI’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가지 고려인자들의 수치를 주고 종합평가하는 방법이다. 주관적이라서 공정성 시비가 있을 수 있는 것이 단점이긴 하다.”

△자연과학분야의 평가가 활용될 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공학의 경우,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 못지 않게 한국의 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중요한 업적이다. 이를 발굴하여 이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교수들 업적평가할 때 학술지 점수에만 매달릴 우려가 있다. 그 외에도 평가의 잣대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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