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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정의는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가
[문화비평] 정의는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가
  •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 승인 2010.11.22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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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개발을 둘러싼 폭력, 국가,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손아람의 『소수의견』이 ‘용산참사’를 겨냥하고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공된 소설의 사건 현장은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지역, 철거민 16살 박신우가 죽고 전경 김희택이 사망한다. 죽은 박신우의 아버지이자 전경 김희택의 살해자로 피소된 박재호의 변호를 맡은 화자인 윤 변호사는 법대 교수, 기자, 운동권 출신 변호사 등 진보적 인사와 함께 사건을 법관기피신청, 국가배상청구소송, 국민참여재판 등으로 확대하고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검찰세력에 맞서 싸워나간다. 결말은 ‘무죄’라는 배심평결과 상관없이 ‘징역 실형 3년’을 받음으로써 현실적인 패배로 끝나지만, 이 실형과 무관하게 살인경찰을 은폐하려고 했던 검사의 비리를 폭로하고 배심원과 여론의 분노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소수의견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에 의해 떠밀린 철거민을 다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초판이 나온 것은 1978년이다. 30년이 지났지만 도심 재개발의 문제는 여전하고 문단 ‘주변부’의 작가들은 이즈음 매끈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위에 ‘망루’의 상상력을 우뚝 세우고 있는 중이다(주원규의 『망루』, 한수영의 『플루토의 지붕』 등). 조세희가 ‘난쏘공’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이것이다. 브로커는 난장이, 곱추에게 입주권을 사서 터무니없는 이익을 남기고, 철거민은 그들의 정당한 몫을 되찾기 위해 브로커를 살해한다. 작가는 ‘입주권’의 가해자(브로커)-피해자(철거민)의 구도를 ‘살해’의 가해자(철거민)-피해자(브로커)의 구도로 바꾸어놓고 누가 더 나쁜 놈이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대립구도에 의한 양자선택을 흩뜨려놓고 있는 이 이야기는 한 개인의 본성이 온전히 책임져야 할 악과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본질은 그것을 양산하고 있는 매트릭스 즉 사회구조 문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손아람의 『소수의견』은 조세희가 암시한 이 사회구조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재호라는 한 철거민에 의해 오성건설과 재개발조합 등의 자본권력, 그리고 이와 야합한 경찰과 검사, 공권력 등의 부패와 비리가 줄줄이 딸려나온다. 경찰 대신 용역깡패를 회유해 법정에 내세운 검사가 외압없이 자발적인 일이었음을 토로하는 장면에서는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악)의 평범성과 관료주의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소수의견』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지만, 재개발의 현장에 밀착해있기보다 검사와 변호인단의 법정공방과 드라마틱한 승리구도에 바탕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견』은 사회소외계층을 옹호하려는 낭만적 정의감의 토로라고만 볼 수는 없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두 번이나 반복되면서 삽입된 ‘기산일’이라는 장의 또 다른 사건이다. 국선변호사인 화자는 사체를 둘러싼 또 하나의 사건을 맡게 되는데, 그가 맡은 피고인은 조폭 두목이다. 그는 오래 전 조직원을 살해하고 묻었는데, 변호사는 이 ‘살인죄’를 공소시효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무죄를 이끌어낸다. 재판이 끝나고 조폭 두목은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의의 승리로군.” 작가는 조폭의 ‘소수의견’의 승리를 철거민의 소수의견에 강력하게 맞세우면서 ‘모든 소수의견은 다 옳은 것인가’라는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 뒤에 거대한 법무 법인의 행태, 즉 숱한 법조인을 거느리고 교묘히 쌍방대리를 피하면서 범죄자를 대리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대리하고, 채권자를 대리하는 동시에 채무자를 대리하는 ‘변호사’의 직능주의를 심문한다.

이 동의할 수 없는 ‘소수의견’은 이 낭만적 법정드라마에 균열을 가져오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라는 소수의견에 복잡한 문제적 양상을 불러온다. 문제를 돌려보자. 만일, 검사가 경찰 대신 용역깡패를 내세워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철거현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더라면? 만일 당신이 재개발 조합의 일원이었다면? 그래도 당신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정의의 승리에 안도할 것인가. 법, 정의의 이름이 현실에서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긴 하지만, 그 강자란 항상 최고 기득권층인 1%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철거민이지 않은 다수들의 대리이기도 한 것이다. 법의 얼굴은, 그 다수를 대리하는 ‘경찰’, ‘용역’을 고용해 그들 개개인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들의 욕망을 집행케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죽음까지는 절대로 의도하진 않았지만, 사적 재산권의 정당한 집행이라는 우리들의 ‘행복’ 증진의 권리 끝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행복의 극대화(공리주의), 개인의 자유(자유지상주의),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세 가지 방식의 정의에 대해 얘기했다. 정녕, 우리는 어떤 정의를 원하는가.

정은경 원광대·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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