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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5) 사회구성체 논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5) 사회구성체 논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 조희연 성공회대
  • 승인 200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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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 뒤 부활하는 이타적 에토스
‘이 땅의 지식인들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한국적 민주주의와 조국근대화의 사명을 완수한다는 미망으로 엄혹한 군사독재에 복무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5년 박현채 선생이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해방 이후 지식사회에서 견결하게 왜곡되고 은폐됐던 개량적 사회변화의 허구성과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면서 논쟁은 이후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과 전망을 놓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제 논쟁은 동구권 블록의 붕괴와 사회변화의 하중을 이겨내지 못하고 빈사했지만 아직도 현재의 정언명령으로 혹은 과거의 잠언으로 맴돌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 이론사에서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통과 유산을 만나본다.

조희연 / 성공회대·사회학

1997년 여름 1개월여 동안 대만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천영산이라는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만의 대표적인 진보적 문인이고 소설가로서는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얼마전 한국에서 열린 세계작가회담에도 초대받아 왔던 분이다. 대만 민주화운동에 관계하면서 1980년대에는 투옥되기도 했는데, 감옥에서 ‘선진’ 운동권의 나라 한국에서 들려오는 사회구성체논쟁을 전해듣고, 그 논쟁을 심도있게 알기 위해 감옥에서 한글을 공부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와 다시 천착해 보려고 하니, 그에 관한 논의가 끊겼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약간은 책망하듯이 말했다. 한국의 혁명적인 민주화투쟁, 그 속에서 전개되었던 논쟁이 이렇게도 餘塵을 가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혁명의 시대를 달궜던, 끝나지 않은 논쟁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수많은 학생운동가, 지식인, 노동운동가들이 밤새워 논쟁하던 시대가 있었다. 자신을 진정한 맑스주의자라고 자임하고 또 스스로 진정한 혁명주의자가 되고자 했던 논쟁이 있었다. 한국자본주의와 한국국가의 근본적 성격을 논하고 그것을 타파할 실천전략을 둘러싸고 벌렸던 이 논쟁, 지금은 까마득한 과거처럼 보이는 1980년대의 이 논쟁을 우리는 사회구성체논쟁이라고 불렀다. 당시 익숙했던 NL, PD 등과 같은 친숙한 분류법은 이제 운동사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린 듯하다. 일견 1980년대 변혁론은 논쟁을 통해서 나름의 체계를 정립하자마자 곧바로 ‘해체’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비쳐졌다. 혁명 풍랑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인가. 1970년대 이후 세계에서 맑스주의가 약진했던 유일한 나라, 분명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던 1980년대 한국변혁운동 및 변혁운동론은 이제 화려한 과거를 ‘청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 논쟁은 당시 한국사회과학의 전통에서 보면 전환적 의의가 있었다. 사회구성체논쟁은 한 마디로 좌파 이론논쟁이며 동시에 좌파실천논쟁이었다. 한편에서는 한국자본주의와 국가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좌파적 해석과 분석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성격규정을 근거로 최적의 전략전술을 구상하며 실천하고자 했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한국전쟁 이후 단절됐던 좌파적 시각과 지향을 계승하고 독재정권 하에서 주어졌던 온갖 사상이론적 억압을 뚫고 금단의 주제들을 지식세계에서 최초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전후 50년 동안 지적 담론의 영역에서 추방당했던 혁명적, 좌파적, 맑스주의적 언술들이 복원되고 그러한 언술로써 정치경제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가 확산됐다. NL과 PD의 대립은 비록 전자가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국사회의 특수성으로서의 민족모순을 주된 것으로 파악했고, 후자가 전후 남한사회의 사회구성의 질적 변화와 한국사회의 보편성으로서의 계급모순을 주된 것으로 파악하는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혁명적 시각과 입장에 서서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논쟁은 성찰하고 극복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우리에게 남겨놓았다. 모든 현실쟁점을 사회구성체론 상의 이론적 쟁점으로 환원하는 이론주의적 경향, 풍부한 현실분석 없이 현상의 계급적 본질을 지적하고 종결해버리고 마는 본질평가적인 경향, 교과서적 맑스주의, 그것도 소련의 국정교과서적 맑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 실천 영역에서의 정당한 경쟁이 ‘끝장내야할’ 정치사상적 쟁점으로 환치하였던 비타협적인 논쟁풍토, 한국전쟁 이후 진보적 이론전통으로부터 단절됐다가 수십년만에 복원되는 과정에서의 지적 조야함, 다양한 사상적 조류들을 개량주의로 낙인지우면서 다양한 맑스주의의 유산으로부터 자신을 풍부화할 수 없었던 지적 폐쇄성, 현존사회주의의 위기와 타락에 대한 놀랄만한 무지, 서구사회에서 맑스주의적 실천의 딜레마와 문제점에 대한 외면, 현대에 대한 분석틀로서의 맑스주의의 제한성에 대한 불감증 등이 1980년대 논쟁 과정에서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진보가 사회주의라는 ‘깃발’의 옹호나, 명제화된 사적유물론의 ‘몇몇’ 명제에 대한 변호, ‘부르조아적인’ 정치경제현실에 대한 단선적인 비판으로만 협애화될 수 없는 보다 풍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우리들이 복원하고 견지해 온 것은 분명 그러한 반성의 요소를 가졌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광풍과 실천 담론

이런 긍정성과 한계 속에서 진행됐던 사회구성체논쟁은 현실 그 자체의 변화에 따라 어느날 갑자기 주변화됐다. 사회구성체논쟁을 추동했던 반파쇼투쟁의 열기가 6.29선언에 의해 식어진 후, 그리고 반파쇼투쟁의 열기가 지배의 세련화 속에서 1991년 5월 분신과 같은 ‘자기파괴적’ 에너지로 소진되어 버린 채, 그리고 이상적 모델로만 바라보아지던 현존사회주의의 참담한 파멸의 충격 속에서, 어느날부터인가 공식적인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침잠하게 된다. NL과 PD논쟁은 전자가 주체사상으로 ‘교조’화돼버리고, 후자가 講壇의 논의로 협소화돼 버림으로써, 1980년대 후반 그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의 소진에는 사회주의 붕괴라는 외적 계기 뿐만이 아니라 자체 동력의 소진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어느 덧 10년이 흘렀다.

나는 지금도 사회구성체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한국근현대사와 사회과학의 온갖 쟁점들이 다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침 유행처럼 ‘무더기로’ 달라붙었다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기만 할 뿐 그것이 깊히 천착되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한다. 좌파이론논쟁이 좌파실천논쟁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형태로 분리되고 양자가 조직적 틀 속에서 정당하게 소통하는 구조를 만들었어야 했다. 좌파이론진영은 사회구성체논쟁의 다양한 구조적 쟁점들을 學派적 수준의 일관성을 가지고 한국자본주의와 국가의 성격 및 그 변화를 설명하고 그 실천적 함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을 지속했어야 했다. 사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입장에서건 식민지半자본주의의 입장에서건 그 입장에서 최근의 남한 자본주의의 변화, IMF위기, 김대중 정부의 부침, 세계화된 조건, ‘제국’의 부상이 갖는 운동론적 의미 등을 설명해야 한다. 좌파적 입장에서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문제, 녹색당의 부상과 노동당의 관계, ‘포스트모던’한 조건, 생활세계의 변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대응하는 실천방략 등 새로운 현실쟁점들에 대한 실천적 제언을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일관성과 지속성, 구체적 설명력을 갖는 좌파적 이론과 실천패러다임일 것이다.

이제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오히려 진보적 흐름들이 회복되고 비판적 분위기가 회복되면서 다양한 쟁점들을 보다 총괄적인 시각에서 혹은 총체적인 문맥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이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비판담론, 실천담론, 급진담론의 회복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풍에 대한 응전 속에서 1980년대 이후 단절된 총체적인 비판담론, 실천담론, 급진담론의 회복이 요청되고 있다.

좌파적 진보의 열정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1980년대와 같은 언어와 형태는 아니지만 1990년대의 소비문화의 확산, 생활세계의 변화, 정보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의 경쟁력 담론의 부상, (의사)민주주의이행 속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각론적’인 성격을 갖는 反주류적인 실험과 시도들이 지속됐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각론적 영역이었기는 하지만 좌파적 진보의 열정을 잃지 않고 현실의 새로운 쟁점들에 지적으로 응전하면서 진보적 해석과 비판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처럼 1990년대의 보수적 사이클 속에서 보수적 담론과 주류적 흐름에 역류했던 노력들이, 다시 총론적 비판담론의 형성이라는 문제의식과 함께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판단해본다. 사회구성체논쟁이 각론적 쟁점들 뛰어넘어 그러한 각론들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관점과 인식시도를 의미한다고 할 때, 최근의 총론적 담론의 부활흐름은 바로 사회구성체적 에토스의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외경스럽게 사회주의 붕괴 이후 나는, 히틀러에 대항해 싸우다가 옥사했던 본회퍼가 했던 말을 이따끔 상기하게 된다. 즉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맑스 없이 맑스 앞에서’, ‘레닌 없이 레닌 앞에서’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80년대의 혁명적 열정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을 사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내던지는 脫我의 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최고의 교육적 ‘기득권집단’일 수 있는 세칭 ‘일류대생’, 나아가 전국의 학생들, 나아가 선진노동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자의 처지로 돌아가고자 정도의 脫계급적 열정과 자기헌신이 있었다. 사회구성체논쟁-특별히 실천적 논쟁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이타적 에토스가 있었다. 이것을 폄하하지는 말자. 지금도 사회구성체논쟁은 단순히 논리로서가 아니라 그런 순수한 정신으로 부활돼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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