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풍경]『한 우정의 역사』출간 통해 본 한국의 벤야민 수용
[책들의 풍경]『한 우정의 역사』출간 통해 본 한국의 벤야민 수용
  • 교수신문
  • 승인 2002.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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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2 11:43:29
『한 우정의 역사』(게르숌 숄렘 지음, 최성만 옮김, 한길사 刊)


이상용 / 영화평론가

벤야민의 목소리는 20세기 철학, 문학, 역사, 신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국내에서 울려 퍼진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지간한 참고문헌과 각주마다 벤야민이 인용되었지만 몇 가지 유형으로 추려질 정도였다.
아우라의 벤야민, 기술복제의 벤야민, 멜랑꼴리의 벤야민, 미메시스의 벤야민, 알레고리의 벤야민 등. 한국 사회의 오랜 수용 방식은 벤야민 앞에 그가 만들어 낸 개념들을 붙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자 벤야민은 신비주의자의 형이상학적 관념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벤야민의 글 속에서 길항하는 계시와 비평의 변증법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국내 수용 이후 ‘비평’하는 벤야민은 여러 방면으로 다루어졌지만 ‘계시’하는 벤야민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구원’을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일반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매개됨 없이 당도해야할 지점으로 이해하는 벤야민의 혁명론은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벤야민을 맑시스트로 이해해 온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실제로 그가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국내에서 이해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오로지 새로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눈을 돌린 미학의 선구자로, 독특한 문예 이론가로 받아들여져 왔을 뿐이다. 매체 미학자로서의 초상은 오늘날 점점 더 영향을 끼치는 벤야민의 영역이지만 좋은 옛것이 아니라 나쁜 새로운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브레히트의 명제가 합당하다면 벤야민을 향한 낡은 국내 수용의 역사는 빨리 파기되어야 한다. 최성만 교수에 의해 번역된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는 새로움을 재촉하는 벤야민의 목소리이다.
낡은 것의 파괴는 필연적이다. 벤야민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가리켜 인문주의적 인간의 종언이자 인류의 시작이 가능함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 폐허의 더미 위에서 새로운 천사가 등장한다. ‘한 우정의 역사’에는 이러한 천사들과의 만남으로 가득하다. ‘아그논’을 읽으며 흥분하는 벤야민, 부버에게 불편한 서한을 보내는 벤야민, 만델 못지않게 탐정 소설을 탐독하는 벤야민, 숄렘이 ‘분열’이라고 부른 유물론자로 전환하는 벤야민 등. 하지만 이 값진 번역서를 읽고 난 후 벤야민의 목소리는 생각처럼 뚜렷하지 않다.
문제는 벤야민에 관한 번역서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벤야민이 살던 시대나 유대 문화에 대한 수용이 국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유대의 작가 아그논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았고, 부버 역시 20세기 독일 사회에서 행했던 유대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실종된 채 ‘나와 너‘의 번역을 중심으로 일부만이 수용되었다. 숄렘의 책을 읽으며 벤야민이 아그논의 어떤 요소에 경탄했는지, 어째서 부버에게 화가 났는지 어림짐작할 뿐이다. 카발라와 유대 문화의 폭넓은 연구와 수용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유대 학자로서의 벤야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탐정 소설을 비롯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몇 편의 영화와 소설이 소개된 것이 전부이다.

복원되는 유대작가의 면모
어렵사리 출판 시장을 뒤지면 과거 카발라에 관한 몇 권의 책과 아그논의 작품 한 두개와 그에 대한 대학 출판부의 개설서 정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이마르 시대를 전후한 문화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최근 롭 번즈가 편집한 ‘독일문화사’(백의 刊)가 도움이 된다.
좋은 전기가 주는 매력이 한 사람을 충실하게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호흡한 시대의 물결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숄렘의 책은 이 점에 있어 충분히 자극적이다. 또한 여타의 전기와는 달리 숄렘의 사상이 전면에 드러나는, 숄렘의 눈에 비춰진 벤야민이라는 점은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한계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어떠한 벤야민 연구서보다 독특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우정의 역사’는 제목 그대로 사상의 우정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학작용이다. 특히 20년대 말 이후 벤야민이 유대의 형이상학과 사적 유물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유대 학자의 단호한 입장을 보여준 숄렘과의 긴장 관계는 세기의 지성인들이 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만남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벤야민의 ‘파사주론’을 비롯한 전집에 수록된 일부 작품들이 계간지에 실리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사상가 미셀 푸코가 17, 18세기의 계보학적이고 고고학적인 분석을 통해 현대성을 갈파한 것처럼, 벤야민은 ‘파사주론’을 통해 19세기와 보들레르를 다룸으로써 사적 유물론을 미시적인 차원으로 끌어들였다. 놀랍게도 20세기의 두 사상가의 조응은 현대성에 대한 사려깊은 조망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벤야민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최근 일부 논객들이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언급하면서 신학 정치를 논의하고, 벤야민을 비판 계승한 폴 비릴리오, 마크 포스터 등의 작업을 수용하면서 전자복제시대에 새로이 걸러진 벤야민의 매체 미학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1970~1980년대를 서구를 달궜던 벤야민 르네상스는 국내에서는 느리게 오고 있지만 벤야민의 다양한 면모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지성만큼 흥미로운 사랑의 역사
그런데 벤야민과 카발라의 유대 관계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한 우정의 역사’가 흥미로웠던 것은 ‘도라’라는 여인 때문이었다. 벤야민의 다른 전기에서 많이 언급되는 여인은 러시아 공산당원인 ‘아샤 라시스’이다. 베를린 주재 문화담당이었던 그녀 덕분에 벤야민은 러시아 몽타쥬 영화를 마음껏 관람하였고, 브레히트와 더불어 맑스를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숄렘은 그녀보다는 여신 유노를 연상시키는 도라에게 더 끌렸던 모양이다. 서구의 지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던 이 시기에 20세기 사상가들과 그녀들의 관계는 지성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사랑의 역사이다.
나는 숄렘을 통해 벤야민의 곁을 스쳐지나간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도라를 새롭게 이해한 셈이었다. 그것은 벤야민의 신학 사상만큼이나 무게를 갖는 관계의 철학이자 한 사상가의 다양한 전기를 맞이하는 독자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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