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 대학원 수업과 인문학 위기
[딸깍발이] 대학원 수업과 인문학 위기
  • 진태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서양철학
  • 승인 2010.11.1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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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이른바 명문대학에서 몇 차례 대학원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우수한 인재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은 학자로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자못 기대가 컸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에게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끼기 어려웠고, 심화된 연구를 위한 기초 능력을 갖춘 사람들도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끼기 어려웠던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관심 분야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다. 이미 전공 영역을 분명히 정한 박사과정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석사과정생들까지도 자기가 논문을 쓰겠다고 정한 분야 이외에는 지식도 부족하거니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문학 또는 철학에서는 학문적 특성상 독창적이고 좋은 업적을 내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요구된다. 가령 헤겔을 공부하는 데 칸트 철학을 잘 모른다거나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올 수 있는 연구 성과의 수준이 어떨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대학원 강의에서 만난 학생들 중 상당수는 헤겔을 전공하니까 오직 헤겔만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외국어 원서를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생들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외국어 독해 능력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 중 하나이고, 학생들이 얼마나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측정할 수 있는 주요 지표 중 하나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 동안의 대학원 강의에서 외국어 원서를 무난하게 공부했던 적이 없다. 원서의 발제를 맡겨 보면 제대로 번역과 해석이 되지 않아, 그것을 바로잡는 데 세 시간을 모두 할애해도 부족한 지경이었다.


386세대 중 한 사람인 나는 80년대 대학을 들어와 90년대에 대학원에 입학했고 2006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박사후 연수를 제외한다면 줄곧 국내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이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부에서든 대학원에서든 좋은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유학생 수가 훨씬 적었고 공식적인 수업 이외에 선후배들이 함께 어울려 독서토론회를 비롯한 공부 모임을 갖는 기회가 많았다. 그 자리는 영어 원서는 물론이거니와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 원서를 읽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였고,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논의들을 접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돌이켜보면 학부와 대학원 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자생적인 공부 모임에서 읽었던 책들, 함께 나누었던 토론들이다.


요즘은 대학 바깥에 각종 인문사회과학 교육 단체가 생겨서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비롯한 일반 교양대중이 참여해서 세미나와 대중 강좌 등이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대학원 교육이 이전보다 훨씬 부실해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학생들이 대학원 수업보다는 학교 바깥의 교양 강좌와 세미나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은 학생들의 관심 분야가 아주 협소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학생들이 국내 대학원 교육보다는 유학 준비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그럴까. 그렇다면 학생들의 외국어 능력이 예전보다 더 떨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니면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기피하기 때문일까. 또는 각종 행정 업무와 프로젝트 사업에 시달리는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학생 지도에 소홀하게 된 탓일까.


이유야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대학원 교육 상황이 이런 가운데서 인문학 분야의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기대하고 고유한 학문적 풍토의 형성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아예 국내 대학원에는 석사과정만 설치하고 박사과정은 모두 외국 대학에 의탁하는 것은 어떨까.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마주친 한 선생님이 격려차 말을 건넨다. “선생님, 수업 시간에 원서 강독 열심히 해서 우리 학생들 유학갈 수 있게 잘 지도해주세요.”

진태원 편집기획위원 / 고려대·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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