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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성의 욕망을 좇아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기
개별성의 욕망을 좇아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기
  • 권경우 문화평론가
  • 승인 2010.11.15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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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켄 고프먼·댄 조이 지음, 『카운터컬처』(김세미 옮김, 텍스트, 2010.10)

문화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꼬라지’라고 할 수 있다. ‘꼬라지’는 꼬락서니(꼴)의 사투리다. 즉 모양새나 됨됨이, 혹은 형태 등을 일컫는다. 결국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를 뜻한다. 우리 주변을 살피는 일은 한국사회의 문화가 어떤 지경에 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문화가 얼마나 천대받고 무시되고 있는지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삶의 다양한 모양새는커녕 주류적이고 지배적인 문화조차도 천박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그 천박함이 이념을 넘어서는 공통의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카운터컬처』의 번역 출간은 왠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다. 문화 그 자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풍토에서 과연 이런 책이 관심이나 끌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반드시 소개돼야 할 책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 출간 시기가 앞당겨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됐다. 제1부는 카운터컬처의 기원과 다양한 요소들을, 제2부는 기원전 500년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카운터컬처 역사를, 제3부는 2차 대전 이후부터 1990년대 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사이버펑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례들을 다뤘다. 특히 2부에서는 소크라테스학파에서 출발해서 입체파, 다다이즘, 로스트 제너레이션, 제임스 조이스, 파리의 보헤미아까지 인류의 문화사 전체를 일관된 흐름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대기적인 선형적 역사 기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책의 구성상 시대적 구분을 따르고 있지만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풍부한 사례들과 다양한 비유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저자는 카운터컬처의 반항적 원형으로 서구의 대표적인 신화 두 가지, 즉 프로메테우스와 아브라함을 끌어들였다.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이다. 역사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 반면 신화는 이상과 상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생각을 확장시킨다. 카운터컬처는 본질적으로 변신을 통한 무한확장을 추구하며, 그 바탕에는 공동체의 신화적 상상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이기도 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기 이전에 최초의 유목민이자 이방인이며 나아가 혁명가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야말로 카운터컬처의 본질인 셈이다. 공저자 댄 조이는 “카운터컬처는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나,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개인의 창의적인 의지에 대한 제약에서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얻고자 추구한다.”

소크라테스학파와 道敎의 ‘共鳴’

이때 필요한 카운터컬처의 중요한 원칙들이 있다. 첫째, 개성을 중시한다. 그것은 타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런 점에서 이기주의나 단순한 공동체주의와는 다른 무엇이다. 둘째, 모든 권위주의에 도전한다. 이는 반권위주의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아나키즘과 유사하다. 이때 ‘아나키’는 폭력이나 혼돈, 파괴의 상황, 즉 무정부라기보다는 더 많은 자유와 민주적 권력을 위한다는 점에서 ‘무지배’를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개인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다. 카운터컬처주의자들은 카멜레온처럼 가변성을 지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최신 유행을 무작정 따르거나 아무 것이나 수용하는 것은 분명 카운터컬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카운터컬처의 전통을 만드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는데, 직접 접촉과 간접 접촉, 그리고 공명(constellation)이 그것들이다. 그 중 공명은 수수께끼와 같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혀 접촉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카운터컬처들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비슷한 시대였으면서도 전혀 교류가 없었던 서양의 소크라테스학파와 동양의 도교가 그러한 예다. 공명은 단지 카운터컬처의 전통을 조직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책의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최초의 ‘카운터철처史’이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닌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흐름을 연결짓고 있다. 그것은 인물, 사유, 매체(media), 추측과 상상에 이르기까지 어떤 특정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읽기에 따라서 혼돈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은 난삽함이나 황당함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책의 구성이나 스타일, 저자의 자질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사유가 내재하고 있는 경직성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예술과 기술의 결과물로서 문화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문화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후자는 기록되지 않은 ‘작자미상’의 것들이며, 입들을 통해 전해지는 구술적인 것들을 가리킨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화는 완결된 가시적 체계보다는 비가시적이면서도 비선형적인 열려 있는 연쇄물일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이미 정형화된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그것들이 형성되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빛의 강조 또는 관습적 규칙 깨뜨리기

이 책의 서문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만나는 디오게네스의 일화가 소개된다. 대왕이 묻는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디오게네스는 답한다. “내 빛을 가리지 마시오.” 문답이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절대권력의 상징인 알렉산더 대왕이 원하는 대답은 돈이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그러한 물음이 갖는 권위를 무너뜨린다. 바로 여기에 카운터컬처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빛이라는 개인의 욕망이 담긴 개별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 권위가 힘을 발휘하는 장(field)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바로 문답의 규칙을 깨는 것이야말로 디오게네스의 방식이고, 카운터컬처의 정신이다.

관습적 규칙을 깨고 새로운 장으로의 이동. 카운터컬처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주류 문화와 저항하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의 장을 바꾸고 새로운 장을 펼치는 것이다. 간간히 눈에 띄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의 문제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책 내용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권경우 문화평론가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문화연구를 전공했으며, 저서로는 『신자유주의시대의 문화운동』등이 있다. 계원예술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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