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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CEO가 순수 인문학분야에 거금을 쾌척한 이유
대기업 CEO가 순수 인문학분야에 거금을 쾌척한 이유
  • 김유정 기자
  • 승인 2010.11.15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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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學 연구모임에 70억원 기부한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사진)이 최근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만든 개인 학술연구실인 實是學舍에 개인 재산 70억원을 기부했다. 이미 올해 초에 기부 의사를 밝혀와 실시학사는 지난 9월 ‘재단법인 실시학사’를 설립했다. 이러한 사실은 실시학사 이사를 맡고 있는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다산연구소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알려졌다.

이헌조 전 회장과 이우성 교수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한시 짓는 모임인 ‘蘭社’에서 친분을 쌓았다. 1983년 결성된 이 모임에서는 故 고병익 교수, 김종길 고려대 교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故 김호길 전 포스텍 총장 등 다양한 인사들이 활동했다.

이우성 교수는 20여년 동안 실시학사를 꾸려 왔다. 지난 1990년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임 한 후 개인 연구실을 차렸다. 이후 현직 교수, 박사과정생 등 후학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공부하고 고전을 번역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실시학사는 이 교수가 연로해지면서 문을 닫을 뻔했다. 이 때 이 전 회장이 실시학사에 70억원을 기부했다. 조건은 단 하나, “실학연구에 써달라”는 게 유일했다.

송재소 교수는 “이 전 회장의 선대부터 한학자 집안이었고, 그 자신도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한학에 깊은 소양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1996년 LG전자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현직에 있을 때도 학술단체에 기부를 많이 했다.

실시학사는 올해 초 내부회의를 거쳐 재단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절차를 거쳐 9월에 정식 출범했다. 사무실 규모도 넓히고 사무국과 연구원을 갖췄다. 이우성 교수가 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강권에 따라” 평이사를 맡고 있다.

재단은 크게 세 가지 연구지원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우선 실학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해 연구 성과를 총서로 발간한다. 올해 5명의 다산연구팀, 5명의 성호연구팀에 연구비를 지급했고 내년엔 연암연구팀, 담헌연구팀, 실학파인문학 연구팀에 연구비를 지급해 한국실학 연구사업을 활발히 펼친다는 생각이다.

학술상도 제정해 내년부터 시상한다. 이우성 교수의 호를 딴 ‘碧史 학술상’은 시니어 학자들이, 이 전 회장의 호를 딴 ‘慕何 실학논문상’은 실학 관련 박사논문을 쓴 젊은 연구자들이 수상 대상이다. 이밖에 국내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실학고전 번역사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송 교수는 “이 전 회장은 평소에도 실학의 중요성을 얘기해 왔다”고 전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위기에 빠진 나라를 실학자들이 나서서 살렸듯이, 현대에도 실학 정신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송 교수는 “경영인이 순수학문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이 전 회장은 ‘학문의 기초가 튼튼해야 국가가 바르게 건설 된다’는 철학을 실천한 장본인이다”라고 말했다.

기업가가 거금을 쾌척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학술단체, 특히 순수 인문학분야에 수십억원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점이 많다. 송 교수는 “지금은 대학 교육의 최대위기”라고 진단했다. 그가 홈페이지에 쓴 글을 인용하자면, “지금 우리나라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을 연마하는 상아탑이 아니다. 기업 경영자들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맞춤형 인재’를 요구하고, 대학 당국은 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형국”이다.

송 교수는 특히 “기초학문분야에 대한 투자 결과는 느리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조급하게 결과만 바라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 전 회장의 기부가 순수 인문학분야 한 길을 걷고 있는 학문후속세대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송 교수는 “하나의 좋은 사례일 뿐이다. 기초학문분야 지원이 국가적인 정책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번 일이 제자들에게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라”고 차마 말 할 수 없는 선배 학자들, 불안한 미래를 안고 있는 학문후속세대에게 큰 용기가 됐음은 분명해 보인다.

김유정 기자 je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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