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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 정치여, 제발 자숙하라
[신문로세평] 정치여, 제발 자숙하라
  • 도정일 / 경희대
  • 승인 2000.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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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8 15:46:32
[신문로세평]

정치여, 제발 자숙하라

도정일 / 경희대 영문학

한 해의 시작과 끝이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우리가 그토록 요란하게 꽹과리 치고 나팔 불며 맞았던 서력 2000년 한 해의 그 화려했던 시(始)의 기억은 '새천년'의 수사들과 함께 아직도 머리에 생생한데 그 한 해가 저무는 지점에서의 종(終)의 풍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다. 이 대조적 차이를 명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끝나는 것들의 종의 모습은 쓸쓸하다. 한 해의 끝자락도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서력 2000년 한 해를 역사의 북망산으로 돌려보내는 이 장례의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쓸쓸함이기보다는 씁쓸함이다. 이 씁쓸함을 성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품 터지는 소리, 고통의 신음소리

2000년 한 해가 말미로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에 울려퍼진 것은 '거품 터지는 소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성찰의 요목이 될 법 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IMF 위기는 완전히 끝났다"고 말한 '졸업 선언'은 국민들이 무식해서 혹시 모를까봐, 혹은 국민들이 하도 정부 업적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제발 좀 알아라"는 취지에서의 발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끝난 놈'의 망령이 다시 덮치는 순간 대통령의 졸업 선언은 그의 선의에 관계 없이 거품의 지위로 추락한다. 무식한 국민이 보기에도 국정 책임자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산업 구조조정, 그에 따르는 불가피한 대량해고, 장기적 고용불안, 점점 짧아지는 불황의 주기 등은 시장세계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시장세계화 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중소 단위의 국가들로서는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모순은 지금 이 땅에 어떤 정치세력이 들어선다 해도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덫'이다.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까 손놓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문제 해결이 근원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부터 알아야 하고 그 어려움의 인식 위에서 정책을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 어려움을 아는 정부라면 함부로 거품 수사를 발(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정은 그 반대이다. 새천년은 과거 천년과는 이래서 다르고 저래서 다르다는 거품 수사들과 함께 '신경제'니 '벤처'니 '모험정신'이니를 국민들에게 열심히 설교한 것은 누구보다도 정부의 정책 책임선에 있는 고위 관리들이다. 그 2000년도 말미인 지금 그 벤처 사업들은 어찌 되었는가? 모험정신은? 일확천금의 모험심에 불타 올라 부정대출과 불법 로비자금 조성에 열을 올리다가 쇠고랑을 찬 몇몇 젊은 사람들의 대표적 모험정신? 지금 벤처의 거리는 터진 거품들로 질퍽하고, 거품 수사만 믿고 뭉칫돈 투자했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한숨소리로 가득하다. 거품 터지는 소리가 그냥 헛김 빠지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신음소리라면 거품은 단순한 비누거품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가져오는 거품이다. 화려한 거품 수사가 고통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잠깐만이라도 상기한다면 정부 고위 관리들, 정책 책임자들, 관변 이데올로그들로서는 거품 발하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인가를 크게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 이 2000년 연말의 가장 중요한 성찰 내용이 될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거품 정치가 현대 한국 정치의 본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일 터지는 수가 있어도 오늘은 거품을 발해야 한다. 거품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사회를 동요시키고 신기루를 띄워 너도 나도 한 줄로 달리다 엎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정치의 요체이다. (한국 언론도 물론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되지도 않은 신조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고 새 구호를 외쳐야 하며 휘황한 수사를 개발하고 '뉴콘셉'(new concept)을 사냥해야 한다. 업적을 과시해야 하고 실적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사회발전과 문화발전을 위한 토대를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기보다는 홍보용 일회성 이벤트 벌이는 데 국민의 돈을 쏟아붓는다. 토대공사는 얼른 현시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언제나 뒷전으로 밀린다. 장관들은 "우리는 정치가입니다"라고 흔히 말한다. 정치가니까 빠른 가시적 성과물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 같은데, 돈 그렇게 쓰라고 국민이 세금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언필칭 '정치가'들은 알아야 한다.

게임만 잘해도 대학 간다?

교육의 경우에도 고약한 거품 수사들의 난무를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고약한 것은 지금이 정보시대이고 인터넷, 디지털, 영상의 시대니까 "책은 안 읽어도 된다"는 극히 잘못된 인식을 조선 팔도에 퍼뜨려 젊은 세대를 완전히 오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인터넷, 디지털, 영상의 시대가 제 아무리 오고 또 와도 책읽기의 교육적 중요성은 삭감되지 않는다. 선형(線型)의 근대적 이성중심주의 매체니 뭐니 해서 문자매체를 내놓고 매도하는 일은 학계에까지 널리 퍼져 있는 기이한 착각이지만 이 착각의 사회적 확산을 부추긴 것은 단연 우리 정부이다. "게임만 잘 해도 대학 간다"라는 것은 어떤 정치인이 장관 시절에 무시로 내뱉던 발언의 하나이다. 게임만 잘 해도 대학 갈 수 있는 시대는 그렇지 않은 시대보다 나은 데가 있다. 그러나 읽기의 능력 개발 없이는 대학 교육이 허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인이 그런 종류의 발언으로 젊은 세대를 마음대로 오도하고 교육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유행성 착각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읽기를 통한 생각의 교육, 진지한 읽기를 가르치는 교육, 진지한 읽기를 좋아하게 하는 교육이야말로 교육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목표이고 과제이다.

한국 정치여, 그리고 정치인들이여, 제발 좀 자숙하라. 아무 소리나 텅텅 하지 말고 거품 발하지 말고 경박성에 대한 경계력을 좀 발휘하라. 서력 2000년을 보내는 장례식이 동시에 한국적 경박성의 장례식이었으면 싶다. 우리 정치의 성숙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자숙의 능력부터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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