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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아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근대사
[문화비평] : 아들에게 들려주는 한국 근대사
  • 배병삼 영산대
  • 승인 2002.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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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2 09:26:33
배병삼 / 영산대·정치학

요즘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과목이 있어, 우리 집 아이도 제 어미에게 영어를 배우느라 아침마다 머리맡이 소연하다. 옛날에는 한석봉의 한자 쓰는 붓과 그 어머니의 떡 써는 칼이 부딪치더니, 오늘날은 영어공부로 모자간에 실랑이다.
헌데 며칠 전 아내가 영어교본을 들고 오더니 옛날과 참 달라졌다고 한다. “I see a mountain”이라는 영어문장이 “산이 보인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나는 산을 본다”라고 했지 않았느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그게 그거지 뭐” 하고 넘어갔는데, 점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면 처음 영어를 배울 때의 “I am a boy”라는 문장에서부터 ‘나’(I)라는 주어는 낯설어 쉽게 친해지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어디 가니?”, “응. 학교 간다”라는 식의 우리네 일상대화에서는 ‘나’, ‘너’와 같은 주어가 거의 생략되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한참 뒤에 알게된 사실이긴 하지만, 그 ‘나’라는 주어의 존재야말로 근대의 상징이었으니, 서구근대의 출발과 끝이 다 ‘나’라는 한 마디에 있었던 것이었다. 정화열 식으로 표현하자면 ‘I(아이)’는 곧 ‘eye(아이)’와 관련되고, 그것은 데카르트, 시각중심주의, 그리고 서구중심의 근대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정화열, ‘몸의 정치’) 그러니 서구의 과학적 사유와 그 정밀성은 이런 주어(나)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선망된 반면, 주어 없이 통용되는 우리 언어생활은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으로 천시되었으니, 그 자체로 근대화의 장애물이었던 셈이다. 곧 ‘나의 부재’, 이를테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 과연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김광규, ‘나’) 라는 관계망 속에 묻혀버린 나, 그 ‘나의 부재’야말로 우리의 낙후성, 전근대성을 증거하는 예시였던 것이다.
이에 근대성, 과학성, 합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없던 ‘나’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영이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와 같은 맥없는 구절들을 추방하고, “나, 너, 우리, 우리나라”라는, 그 ‘나’로부터 출발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근대화의 서사’를 초등학교 교과서 들머리에 장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I see a mountain”을 “나는 산을 본다”라고 읽어야만 하지, “산이 보인다”로 읽어서는 결코 안 되는 까닭의 내력이었다.
헌데 어느 날 “내가 산을 보”지 않고, “산이 보이는” 순간이 닥쳐왔다. 1980년 5월 18일은 그 동안 그렇게도 명징했던 ‘나’를 잃어버린, 아니 세계를 파악하는 ‘눈’(eye)을 얹기에 그렇게도 튼실했던 삼각대로서의 ‘나’(I)를 버린 날이었다. “한눈으로도 세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一目瞭然] 명료한 ‘한 눈’을 잃으면서 ‘나는 산을 본다’가 아니라 ‘산이 보인다’로의 길이 생겨났다.
그 날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너(미국/근대/서구화)는 누구냐’라는 ‘산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그 산을 보고 달려간 ‘나는 누구냐’라는 의심이다. 실은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5.18은 미국으로 상징되는 근대화-서구화를 북극성[理想]으로 삼았던 ‘눈길’을 되돌려 우리네 ‘발’을 내려다보게 만든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20년 동안 우리는 ‘너’에 대해 ‘혈맹’과 ‘우방’이라는 선망의 눈이 아니라, 국제정치(힘)와 국제경제(시장)라는 차가운 눈으로 새롭게 보고 또 배워왔던 터였다. 이렇게 ‘너를 낯설게 바라보는 각성된 나’가 쌓아온 20년의 이력이 “I see a mountain”을 “산이 보인다”로 번역하게 만든 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산이 보인다”라는 번역에는 ‘나’가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지만, 실은 “나는 산을 본다”라는 번역 보다 더욱 강렬한 ‘나’가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 덜 깬 눈을 비비며,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채 영어를 배우고 있는 어린 아들아. 조선의 한석봉이 눈감고도 한문을 잘 썼듯, 너도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그것이 이 작은 나라의 국민으로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허나 잊지 말아라. 그들이 “I see a mountain”이라고 하더라도, 너는 “나는 산을 본다”가 아니라 “산이 보인다”라고 읽어야 함을. 그들이 “I see”라고 한다고 해서 “나는 본다”라고 휘둘리지 말고, 의연히 “보인다”라고 ‘버텨 읽거라’.
만사가 그런 것. 어리광 부리지 말고, 껄떡이지도 말아라. 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방만하지도 말아라. ‘너’를 새로 보게 만든 계기였던 5.18과, ‘나’를 질문하는 부처님오신날이 올해 연이어 든 까닭도, ‘삶이라는 소롯길을 스스로 곧추 서서 의연히 걸어라’는 뜻일 테다. 잊지 말아라.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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