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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다” 은하수 쏟아지는 푸른 밤, 山들의 황홀경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다” 은하수 쏟아지는 푸른 밤, 山들의 황홀경
  • 조준 산악사진가
  • 승인 2010.10.25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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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으로 들어온 한국의 산

 

조준, 노고단에서 본 반야 일주, 100x138cm, pigment print, 2010.   ⓒ  조준

 

작가 노트

사실 산악사진은 어렵지만 즐거움과 삶에 많은 유익을 주는 아주 기특한 취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정말 아름다운 산과 자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쏟아질 듯한 별과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잠이 들 수도 있고, 계절이 바뀌는 산 정상에서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합니다. 부드럽고 촉촉한 雲海에 온 몸을 맡기는 기분은 정말 ‘황홀경’의 체험이어서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은하수가 땅 끝에 걸쳐있는 밤의 광경 속에서는 모든 세상이 사라진 듯한 고요함만 가득하고, 오직 심장의 박동소리만이 살아있음을 실감케 합니다. 새벽 새들의 지저귐, 물소리, 빗소리, 심지어 도토리 한알 한알 톡톡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슴 속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저에게 산사진을 처음 가르쳐 주신 한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산에 다니게 되면 평생 살면서 못 볼 귀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될거야”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산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역무지개 현상인 ‘부로켄 현상’ 등 여러 가지 신기한 기상현상은 일상적인 삶의 궤도 안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 그것을 실제로 보고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저 산사진을 찍으려 했던 것 뿐인데 오염되지 않는 물과 공기를 마시며 최고급의 운동을 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살아있는 물맛, 살아있는 공기의 향을 항상 그리워하게 돼, 이제는 사진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산을 찾게 됩니다. 항상 달고 다니던 감기도 이젠 저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역시 산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조준, 고사목과 야생화, 110x75cm, pigment print, 2010. ⓒ  조준
仁者樂山이라고 했던가요. 산을 다녀서 인자해진 것인지 인자해서 산을 다니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자하고 지혜로운신 분들을 만나게 되고 그분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꽃피우는 밤 또한 더 없는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동료 산악사진가 선후배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밤에 혼자 산에 오르거나 야간 촬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혼자 있게 되면 산짐승-멧돼지나 들개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까지 스멀스멀 피어나기 때문에 사실 무섭고 고통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수면이 부족해 정신이 흐린 날 혼자서 야간등반을 하다보면 그 무서움이 전신을 압도합니다.

마이산 촬영 때 일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날은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뒤라 정말 말도 안 되는 맑은 시야가 펼쳐졌던 날이었습니다. 보통은 촬영 장소가 땅에 가까울수록 스모그나 각종 먼지들 때문에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데, 그날은 지평선까지도 별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달의 방향과 여러 가지 상황 상 몇 년을 기다려왔던 마이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날이라 혼자 기쁨에 겨워 생각했습니다. 탐색해뒀던 포인트를 찾아 삼각대를 펴고 야간촬영이기에 랜턴을 끈 채 구도를 잡고 있는데, 수풀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척척척척 척척척척. 놀라서 처음엔 털끝 하나까지 신경이 곤두섰지만, 애써 태연하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촬영을 해보니 문제는 달의 위치가 생각과는 달리 한 시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어서,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면 시간이 늦을 수밖에 없어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얼마 뒤 환상적인 상황에 취해서 촬영에 몰두 하고 있던 그때 옆 풀숲에서 갑자기 송아지만한 무언가가 튀어나왔고 반사적으로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르며 랜턴을 켰더니 빛이 반사된 알 수 없는 광채 두 개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또렷하게 망막 속으로 기어들어왔습니다. 그 광채는 곧 숲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때 그 푸르스름한 낯선 광채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이산은 산이 낮아 아마도 들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준, 상고대와 가야산, 170x60cm, pigment print, 2010. ⓒ  조준

 이렇게 촬영하다보니 사진 하나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고, 원고 한 장 한 장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들여다보고 세상 근심 모두 뒤로 한 채 너무 행복합니다. 어떤 분께서는 힘들게 산에 다니는 저를 보며 왜 그렇게 모질게 사는 거냐며 좀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 산악사진이 정말 즐겁습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을 올바르게 하며 하루가 다르게 자꾸 훼손돼가는 한국의 아름다움, 한국 산의 정경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 일에 제 인생을 던지고자 합니다.

 

언제나 말없이 그 자리에서 투정 없이 언제든 저를 받아주는 산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조그마한 별들처럼 열심히 하라며 일면식도 없이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 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마음으로나마 응원하는 많은 분들의 마음을 기억하며 저는 오늘도 산으로 향합니다.

조준 산악사진가

조준 산악사진가 stormkid@nate.com

 

필자는 패션플러스 멀티미디어팀 촬영 팀장으로 있으며, 한국의 산을 전문적으로 찍고 있다. 4년간의 산악사진활동을 모아 첫 전시회를 삼청동 정독 갤러리(2010.10.21.~26), 내장산 국립공원 탐방 지원센터(2010.10.28~11.28)에서 연다. 그의 전시는 2010 조니워커 킵워킹 펀드 지원으로 이뤄졌다. 010-5650-8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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