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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文人音樂을 아십니까?
[딸깍발이] 文人音樂을 아십니까?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10.10.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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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江華양명학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해 처음으로 文人音樂이란 걸 들었다. 학술대회를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참 색다른 체험이었다. 아동들에게 공부에 앞서 ‘詩歌’로써 ‘志意’를 펴도록 하는 교육방법을 중시했던 王陽明의 성향을 잘 살린 학술대회였다는 느낌이다. 

왕양명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체로 아동의 심정은 자유롭게 놀기를 좋아하고 구속을 싫어한다. 초목이 처음 눈망울을 터뜨릴 때 이것을 그대로 자유로이 뻗어나가게 하면 쭉쭉 자라나지만 방해하거나 구부리게 되면 기운이 시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 (……) 때 맞춰 내리는 비와 봄바람이 초목을 촉촉이 적셔주면 싹을 틔워 기운차게 뻗어나가 자연히 날로 달로 성장해 가건만, 만일 갑자기 寒氣가 들어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리게 되면 生意가 쇠퇴해 나날이 말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왕양명의 말은 아동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연구실에 처박혀 주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 文人들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학술의 양적 팽창이라는 압박감, 그런 그로테스크한 知的 환경을 견뎌가는 우리들이 ‘時雨春風’ 같은 연구 환경을 만난다는 것은 사치스런 空想인 듯. 시우춘풍이 없는 오늘날의 팍팍한 조건을 견디려면,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바로 朱子流의 ‘居敬(경건한 마음상태에 있음)’은 理를 거울로 해 마음을 한군데로 다잡아 밖으로 발산될 에너지를 극히 단순화시켜 ‘고요히’ 가라앉히는 훈련법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들은 문인음악은 조선조 후기 거문고 음악문화를 향유하던 선비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조선의 지식층들이 음악을 향유했다니?’ 뭔가 신선한 느낌이 든다. 단조롭고, 느리고, 투박한 거문고의 音色, 연주자의 손놀림. 게다가 무덤덤한 표정. 한 마디로 문인음악은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論語』 「八佾」)는 中庸의 정신이 잘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서(향해서) 노래 부르던’ 선비들의 속내가 무엇일까를.

세상을 향한 공허한 립 서비스를 걷어치우고 그들은, 나침반의 바늘이 끊임없이 몸을 떨면서 방향을 잡으려 하듯, 묵묵히 중용을 찾고자 했을까. 거문고의 선을 치며 떨리는 줄을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소리의 ‘비율(ratio)’이 過한 것은 죽이고 不及한 것은 살려가며 고요히 共鳴해보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마음을 ‘닦아(修)’ 그것이 사회·정치 현장에 노출됐을 때 이르는 곳마다 잘 調節(분절화)돼 과불급이 없도록 훈련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부단한 감정 다스림의 시뮬레이션은 다이내믹한 실제의 사회-정치의 속살과 건강하게 소통하는 힘을 길러준다. 리얼한 역사의 현장 속에 문인들은 가끔 우두커니 서 있거나, 누구엔가 말을 걸거나, 걷거나, 떠돌면서 살아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思想하던’ 風光이자 행동하는 지식 즉 ‘理의 발동(發)’ 자체였다.

문인들은 음악을 하면서 ‘고요한(靜) 마음’을 평소 지키고 있었다. 고요한 마음은 ‘닦달(Gestell)’하는 것, 밖을 향한 ‘관찰’(=테오리아)과 달리 끊임없이 수직적 ‘깊이’를 가지고자 한다. 『禮記』 「樂記」편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것은 천성이다. 사물을 접하여 느낌이 있어 움직이는 것은 본성(천성)의 욕망이다”라고 했다.

心身에는 접힘과 펼침이 있다. ‘未發의 고요함(靜)’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至善한 행동을 길어 올리려는, 꼿꼿하고도 무표정한 손짓, 몸짓. 선비들은 그런 마음상태를 신체화·내면화하려고 實戰에 앞서 평소 부단히 가상현실 게임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성과급제 등 끊임없는 평가 상황, 그로 하여 전시체제처럼 동원되는 교수들의 황폐해진 내면풍경을 생각하면 문인음악은 우리에게 무언가 삶의 가이드라인을 노래해주는 듯하다. 온갖 평가와 사업에 ‘닦달’당하며 일렬로 닦아세워진 우리에게 지금 ‘고요함(靜)’은 다시 ‘뿌리(根)’가 될 덕목이라고.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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