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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 사전, 말과 사물이 날과 씨로 만나 엮은 문화의 뜰채
[집중조명] : 사전, 말과 사물이 날과 씨로 만나 엮은 문화의 뜰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5.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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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15 08:56:20

얼마 전 박재연 선문대 교수(중어중국학)는 ‘中朝大辭典(선문대학교출판부)’ 9권을 펴냈다. 한자 1만2천8백14자, 표제어 6만9천3백52개, 용례 42만5천9백18개로 이루어진, 실로 어마어마한 이 작업은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시작돼 올해 ‘비로소‘ 끝을 맺었다. 표제어(올림말)를 뽑아 낱장의 카드에 빼곡이 적어 늘어놓던 손작업 7년에, 컴퓨터 입력작업에만 10년 세월이 더해져서 만들어낸 방대한 기록이다.

중조대사전은 조선시대에 쓰였을 법한 중국어를 당시 우리말로 풀이해놓은,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中韓辭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통역관들이 썼던 중국어사전, 중국어 회화책 등 옛 문헌 2백 30여종을 샅샅이 뒤져낸 결과다. 17년을 하루같이 10시간에서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있었던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재미있어서”라고 말하지만, 뒤이어 “이렇게 끝이 없는 일인 줄 알았으면 아예 시작을 안 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렇듯 사전 만드는 일은 ‘밑도 끝도 없는’ 일이다. 논문이나 웬만한 단행본하고는 작업량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다. 박 교수처럼 20년 가까운 세월을 사전 하나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하나를 손 털기까지 5년은 쉽게 넘기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작업에 왜 매달리는 것일까. 박 교수처럼 개인적으로 사전을 만드는 이들이 한결같이 내미는 이유는 ‘어쩔 수 없어서’이다. 공부에 필요한 제대로 된 사전을 찾지 못해 낙담하다 ‘그렇다면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에 뛰어들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연구를 위해서 사전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 학문 현실의 씁쓸함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사전 편찬은 학자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학문의 ‘지렛대’, 권력의 ‘길라잡이’

함께 쓰고 혼동하기 쉽지만, 사전은 두 가지로 나뉜다. 辭典(dictionary :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발음·뜻·용법·어원 등을 해설한 책)과 事典(encycolpedia :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설명, 해설한 책)이 그것인데, 국어사전과 백과사전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전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김정근 부산대 교수(문헌정보학)는 사전을 ‘도구’라고 정의한다.

“‘말사전(辭典)’이든 ‘일사전(事典)’이든, 사전은 모두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도구이다. 지렛대가 있어야 물건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듯이, 도구가 있어야 말공부, 전공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렇듯이 초등학생부터 전문직업인에 이르기까지 또래에게 맞는 도구를 만들어줘야 한다.”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학문의 발달을 위해 먼저 사전이 발달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한국은 사전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나라다. 우리사전을 만들기 위한 출판사들의 노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사전이나 미국사전을 통째로 ‘번역’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라고 김정근 교수는 지적한다.

사전의 발달을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성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목요연한 정보의 체계화는 곧 권력의 체계화로 이어진다는 것. 임상범 성신여대 교수(사학)는 사전을 ‘말과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려는 권력의 속성’으로 설명한다. “사전은 언어와 사물, 시간과 공간이 체계화된 형태이다. 漢이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통일했을 때, 중국 너머 세계까지 지배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시간과 공간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사전이 설문해자이다. 역사서 사기 또한 시간 통제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

고대 로마를 비롯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에서 사전이 발달하고, 현대 일본에서 지역과 언어에 대한 체계화된 사전이 일찌감치 발달한 이유가 가설을 뒷받침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백과사전을 펴내려 했던 이유 또한 ‘우리 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려 했다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학문 편식 극복, 토착화 관건

그렇다면 시중에 나와있는 사전은 총 몇 종이나 될까. 사전전문 출판사나 출판 관계자들도 정확한 수치를 잘 모른다. 민중서림 사전팀의 한 직원은 “하나의 사전이라도 대상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판형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내기 힘들다”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경제, 공학, 시사, 신학, 의학, 컴퓨터, 인터넷용어 등 학문 분야와 일의 쓰임에 따라 그 종류가 수도 없이 많다고 짐작할 뿐이다. 대표적 사전 출판사인 민중서림과 동아출판사가 내놓은 사전이 각각 50 여종씩이다.

학문 편식이 심한 세태를 반영하듯 사전에도 인기, 비인기의 편차가 크다. 철학사전, 사회과학사전들은 실용사전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서점 사전코너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어 사전도 절반 이상이 영어와 일어이다. 한국외국어대출판부가 진행하고 있는 외국어사전 편찬 작업은 그래서 더욱 귀하다. 1996년 10월 ‘네덜란드어-한국어사전’을 첫 번째로 펴낸 뒤, ‘루마니아어-한국어사전’, ‘스웨덴어-한국어사전’, ‘폴란드어-한국어사전’ 등 유럽어 사전을 비롯해 ‘터키어-한국어사전’, ‘페르시아어-한국어사전’, ‘힌디-한국어사전’, ‘스와힐리어-한국어사전’ 등 아랍과 아시아어 문화권에까지 사전작업을 벌여 지금까지 20권을 펴냈다. 수요에 상관없이 할 일은 하겠다는 고집스런 태도가 학문 편식의 처방전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김정근 교수는 우리 사전이 풀어가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로 ‘토착화’를 꼽는다. “프랑스, 영국, 미국의 사전이 훌륭한 이유는 그들의 머리로 그들의 필요에 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브리태니커가 아무리 훌륭해도 서구인의 눈으로 본 세계일 뿐이다.”1958년 학원사에서 펴낸 ‘대백과사전’을 최초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짧은 사전 역사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이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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