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2:05 (토)
시간·실적·평가 모두 쪼개써야 … 대학평가 순위 올리려다 신진학자 싹 자를라
시간·실적·평가 모두 쪼개써야 … 대학평가 순위 올리려다 신진학자 싹 자를라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0.10.11 1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40代 교수들이 말하는 ‘이 시대의 교수’

 

“10분쯤 걸린다고요? 잠시만요.”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네, 선생님. 네…” 3~4년차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됐을 만도 한데, 하나같이 다급한 목소리였다. 다들 쫓기듯 ‘용건만 간단히’하잔다. “선생님, 교수직 하시면서 가장 큰 고민은 뭔가요?” 기자가 용건을 던지자 덥썩 잡아챈다. 결코 간단치 않은 답변이 쏟아진다. “저는 뭐 전반적으로 만족합니다만, ‘동료교수들에게 듣기로는’…” 재임용·승진평가, 논문생산, 강의, 넘쳐나는 행정업무 등등 봇물이 터진다.

그렇다. 요즘 신임교수들, 할 말 참 많다. 특히 알 것 알고, 덮어둘 것 돌려 말할 줄 아는 3~4년차 신임교수들은 대학가의 ‘중고신인’이다. 이들이 임용됐을 때부터 대학가는 확실히 바뀌었다. 대학평가가 일상화 되고 교수신분은 논문 숫자가 결정하고 있다. 한 신임교수의 말마따나 ‘바쁜 게 정상’인 게 신임교수지만, ‘곤란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그들의 우려에서 대학가의 묵은 고민이 읽힌다.

‘홈런보다 단타’ 연구업적평가의 그늘

“교육한다고 논문 나옵니까?” 서울에 있는 연구중심대학 ㄱ교수는 연구실에서 논술채점 중에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아는 얘기 길게 할 것 있냐는 투다. 얼른 끊고 채점부터 끝내놓고 싶을 터. ㄱ교수는 수업시간 전까지 채점을 마쳐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학회지 편집업무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요즘 이공계 신임교수들은 1년에 SCI급 논문을 1~1.5편 꼴로 써내야 한다. 이는 계약기준을 산술적으로 나타낸 것일 뿐, 실제 대학이나 학과의 요구는 이를 훨씬 웃돈다. 신임교수들은 “대학평가에서 논문실적은 ‘총합’으로 산정한다. 평균치를 올리려면 아무래도 신임교수들이 분발해주기를 바란다”고 입을 모은다.

지역대의 한 이공계 ㄴ교수는 재임용 기간 2년 동안 SCI급 논문을 두세 편 써야한다. ㄴ교수는 “SCI급 논문은 편당 1년~1년 6개월은 걸린다. 논문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 심지어 연구과제 수주나 강의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해외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일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이다. 충분한 연구기간이 필요하고 투고 후에도 심사기간이 길다. 최소 1~2년 계획을 잡고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게재된다는 보장이 없음은 물론이다.

학제간 연구? 입구가 막혔는데…

최근 부상하고 있는 ‘학제간 연구’도 신임교수들에겐 짐이다. 신임교수에게 학제간 연구는 이미 연구실효성 문제를 떠나있었다. 수도권의 한 연구중심대학의 사회계열 교수는 3년간 800% 이상을 써내야한다. 등재지에 개인연구로 10여 편이다. 연구자가 늘수록 교수의 마음도 조급해진다. 해외학술지는 두세 배의 가산점을 준다지만 이 대학의 한 교수는 “학제간 연구로 점수를 채우기 힘들다. 차라리 좀 낮은 등급이라도 (개인연구로) 학술지에 투고해서 점수관리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박리다매 전략이다. 재임용이든 승진이든 신임교수도 연구력으로 승부하고 싶다.

게다가 이 대학은 얼마 전부터 연구업적을 ‘소급적용’하고 있다. 이쯤되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른 교수도 나온다. “재임용 논문 편수 기준이요? 매년 오르는데요 뭘… 이젠 잊고 살아요. 그래도 ‘임시직’이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하라면 하는 거지.”

선배교수 방을 기웃거려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어차피 선배교수도 실적을 채워 넣는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지역 사립대의 한 교수는 “선배교수들이 조언을 많이 주지만 같이 평가받는 입장이다보니, 현실에 적용하기엔 안 맞는 면이 있다”며 머쓱해했다.

탈모 부르는 학과업무

대학이 각종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행사도 늘었다. 학제간 교과목이나 사회봉사 프로그램 등 교과과정 개편에도 신임교수가 투입된다. 최근에는 대학이 교육 내실화를 선언하면서 밀착식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신임교수들은 보고서 첨삭, 동아리반 지도, 일대일 면담, 학업·진로지도, 교수법 강의 참석 등 자의반 타의반으로 많은 일들을 해내야 한다.

그럼에도 신임교수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건 단연 입시관련 업무다. 고교 방문은 물론이고 문제 출제, 채점, 면접까지 전과정을 맡는다. 지역대의 경우 학생 충원과 이탈률을 급여에 연동시키기도 한다. 한 지역대 교수는 스트레스로 탈모치료를 받고 있다.

공동연구과제를 해도 계획서 작성, 발표, 평가 등 결국은 신임교수의 몫으로 떨어진다. 학회활동까지 일종의 행정업무로 느껴진다. 인문분야는 교수충원이 ‘가뭄에 콩 나듯’해서, 이공계는 과제수주를 위해서라도 보통 서너 개의 학회에 가입한다. 여기서도 신임교수들은 손이 많이 가는 편집업무에 투입된다. 한 이공계 교수는 “자신을 알리고 연구주제를 홍보하려면 학회활동을 부지런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시간 쪼개다 토막난 강의실

ㄱ교수는 운 좋게도 모교에 둥지를 틀었다. 석사과정에서 지도교수를 통해 교수로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연구자로 살겠다는 일념으로 교수가 된 ㄱ교수의 눈에도 ‘해도해도 너무하다싶다’는 장면이 포착됐다. 대학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배된 학생들의 강의불만족 비난이다.
ㄱ교수는 “이제 무뎌진 듯하다”고 말한다. 스스로도 심각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ㄱ교수는 “신임

교수는 오로지 연구실적만으로 평가된다. 교육은 전임교수 비율, 강의담당비율 등 교육여건으로 평가하지 강의의 질은 평가대상이 전혀 아니다. 최근에 부쩍 대학들이 교육을 강조한다는 말은 많지만 객관적인 평가는 전무하다. 모순적이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재임용 통과만이 살 길

대학에 적응하랴, 연구업적 내랴 신임교수는 분주하다. 몸은 바쁜데 마음은 늘 불안하다. 빠듯한 일정 속에 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신임교수들은 이 기간 동안 자기검열에 빠진다. 지역 국립대의 ㄷ교수는 “해외학술지를 목표로 연구하다가 만약 논문이 채택되지 않으면 2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꼴”이라며 “1년에 1편이라도 결과물이 나와야 마음이 놓인다. 평가가 연구주제를 좁히게 만든다”고 말했다.

2007년 수도권 대규모 연구중심대학에 임용된 또 다른 이공계 ㄹ교수는 지난해 재임용을 통과했다. 올해는 학과에서 보직을 맡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는 건 다르지 않았다. “재임용 심사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급해지니 질적으로 심도있는 연구는 제쳐둘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대학평가가 신진학자 잡는다

3~4년차 신임교수들은 대체로 “연구업적 수준을 높여가는 대학의 요구는 받아들인다”면서도 “대학원생, 실험 공간, 연구비 등 지원은 뒤따르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다짜고짜 업적부터 내놔라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신임교수들은 시간싸움을 벌이고 있다. “벤처기업에서 일할 때보다 퇴근도 늦고 할 일도 많다는 게 엄살이 아니다”라는 한 사립대 교수의 말은 시사적이다. 과열되고 있는 경쟁적 평가방식이 신진학자들에게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이다.

글·사진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