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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거짓의 장막을 걷어내기
[學而思] 거짓의 장막을 걷어내기
  • 정성기 경남대
  • 승인 2002.05.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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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18 11:21:54
정성기/경남대 경제학

리의 당대인 지난 십 수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변화가 급격하고 심대한 시절이 아닌가 여겨진다.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급격하여 ‘사회’에 대한 기성의 관념을 금방 낡은 것으로, 거짓말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당혹스럽고 어지럽다.

소비에트의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졌을 때, 레닌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가장 선명하게 뇌리에 박힌 다른 하나의 장면은 각급 학교에서 교과서를 전부 뜯어 고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교과서가 거대한 거짓말의 체계요, 선생이 거짓말쟁이였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졸속으로 만드는 새 교과서는 얼마나 거짓말이 많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난 10여년간 이 땅에서 신자유주의의 정치권력과 교육·지식권력이 위세를 떨쳤지만 이 땅에서 ‘선진화와 민주화’에 대한 장밋빛 꿈은 밑바닥의 대중들에게 갈수록 거짓 신기루인 것 같다. 미국에서조차 새천년 벽두에 ‘신경제’ 거품이 무너지고, 9·11 테러사태까지 거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문명’에 대한 신념은 무너져가고 세상은 일거에 종교전쟁을 치러던 중세로 되돌아 가고 있는 양상이다.

보세력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해 왔지만 올해 들어서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의 정세를 보아 ‘사회민주주의의 죽음’도 분명한 것 같다. 우파는 부패하고, 좌파는 우경화하고, 실망한 노동자들은 분열하여 극우파와 극좌파를 지지하고, 극우파가 득세한다고 데모를 하고, 암살을 하고,진보의 종말, 근대 민주주의의 종말을 보는 듯하다.

몇 년 전, 학부 시절의 은사이자 동료 교수였던 선생님 한 분이 고인이 되셨다. 학부 시절 학문적으로 그렇게 신뢰하지를 않았던 그 분이 사석에서 종종 내놓고 “나는 거짓말 참말 반으로 먹고 산다”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난다.

나는 실력이 괜찮고 진실을 가르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기 정직성은 그 선생님 만큼도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요즘은 강의를 하는 것도 갈수록 힘들어진다. 내가 쓰지도 않은 ‘경제원론’이나 ‘정치경제원론’은 물론 남이 쓴 전공 과목 교과서를 교재로 강의를 해 오면서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부터 거짓말인지를 구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전공학부 학생들이라도 ‘경제무역’ 전공이 좋아서 들어 온 학생은 20%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 학생들을 놓고, 무지막지한 볼륨의 교재를 놓고 매시간 진도에 쫓기면서 주저리 주저리 ‘설명’하고, ‘해설’하고, ‘비평’하려니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갈수록 대학에서도 ‘교실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학생들이 학습 의욕을 잃고 있다. ‘19세기 이론으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는’ 꼴이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 도처에 이렇게 저렇게 고치자는 소리가 높지만, 존재의 존재 가치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 혹은 급진적인 의문이 갈수록 늘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저것도 ‘국회’요 ‘정치’인가 묻고, 경제학교수조차 ‘마적정치’를 질타하는 세상이 되었다. 정치인을 미화하는 기사를 쓴 후 ‘당신도 기자야?’라는 소리를 들은 유력지 기자가 기자를 그만 둔 일도 생겼다. 정치와 놀아난 종교를 질타하며 ‘교회가 망해야 예수가 산다’는 책이 나온 세상이다. 교수 입장에서야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는 세간의 소리가 생각할수록 아득하다.

어떻게 해야 ‘참말’이라고 확신을 갖고 가르치며 선생노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갈수록 가파르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려 학생들과 세상과 나눌 수 있을까. 좀 더 자세를 낯추어 도처의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고통과 즐거움을 몸으로 알아야 할텐데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을 스스로 체험하는 공부 말고는,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 낸 희망 말고는 ‘진실’로 알고 믿음을 갖고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경남대·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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