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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비행으로 읽어낸 ‘通史’ 한국미술
고공비행으로 읽어낸 ‘通史’ 한국미술
  • 교수신문
  • 승인 2010.10.0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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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유홍준 지음,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눌와, 2010)

따끈한 신간의 文字香은 책의 아우라다. 저자의 숨결과 문자가 결합하는 순간, 지적 긴장감과 흥분을 예고하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어김없이 달려온다. ‘책갈피’는 이런 지적 긴장감과 흥분을 예고하는 신간들의 본문을 더듬어가면서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만나는 자리다. 이번 호에서는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과)의 신작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유홍준 지음, 눌와)의 문자향을 따라가 본다.

 

이 책은 비록 입문서이지만 한국미술사의 通史이기 때문에 나의 미술사관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동아시아 미술사 전체 흐름’ 속에서 한국미술사를 이해하는 점이다. 기존의 한국미술사 책 첫머리는 대개 한국미술의 특질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미술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밝히는 노력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볼 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章마다 당시 중국·일본과의 교류를 이야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미술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간혹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의심받고 때론 문화적 열등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적 영향이란 저절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수용자의 적극적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다. 중국이 제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은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로 가름되지 않는다. 유럽 중세의 기독교문화를 아무도 유대문화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미술이 인도에서 왔다고 낮게 평하는 일이 없다. 한국의 불교미술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를 더 발전시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발달한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동아시아의 제 민족들은 역사상 이름만 남기고 다 사라져버리거나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미륵사터 서탑 사리함 외호, 백제, 익산 미륵사터 서탑, 높이 13.0cm, 국리문화재연구소 소장.

19세기 이전에 동아시아문화를 주도한 중심부는 중국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몽골 등이 중요한 일원이었다.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동아시아문화는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됐다. 고려사람마저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세계 청자의 역사는 중국 청자의 역사 하나로 끝날 뻔했다. 한국이 빠진 동아시아 문화사는 불완전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당당한 지분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이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1965년에 발견된 금사리함은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사리함 중 하나로 그동안 통일신라의 유물로 추정돼왔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사리장엄구가 아주 발달해 송림사 오층전탑, 감은사 동탑과 서탑, 불국가 석가탑 등에서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리함이 발견됐기 때문에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함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함이 발견된 1965년만 해도 백제의 금속공예품으로 이에 견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의 무령왕릉, 1997년의 백제 금동대향로, 2007년의 왕흥사 사리함, 2009년의 미륵사 서탑 사리함 등 일련의 발굴 성과로 인해 이제는 백제 금속공예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고, 또 근래에는 여기서 함께 출토된 은제 도금 금강경판도 백제 유물로 추정되고 있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함은 이제 백제의 유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병은 목이 긴 파란 유리병으로 늘씬한 곡선미가 아름답다. 그리고 만개한 연꽃 받침대에 예쁜 꽃봉오리 마개를 닫은 절묘한 구성이다.

사리병이 봉안된 사리함은 금판으로 만들어진 사각함으로 뚜껑의 꼭지에는 만개한 연꽃이 맵시 있게 달려 있다. 사리함의 몸체에는 연꽃과 넝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는데 무의의 모양과 타출 기법은 미륵사 서탑 사리함과 양식상으로 깊은 친연성을 띠고 있다. 넝쿨무늬로 띠를 두른 점, 주무늬를 면새김으로 처리한 점, 바탕무늬로 동그라니무늬를 장식한 점 그리고 이파리 3개가 난 연꽃잎과 어자무늬는 거의 한 솜씨로 보일 정도이다. 이로써 우리는 백제의 사리장엄구로 왕흥사 사리함, 미륵사 서탑 사리함,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함 등 3점의 뛰어난 금속공예품을 간직할 수 있게 됐다. 이 3점의 사리함은 백제의 금속공예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막연히 갖고 있던 백제의 아름다움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백제를 생각할 때면 먼저 이 3점의 사리장엄구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백제미’에 보내는 경의조차 표할 수 있게 됐다.

   이 백제 사리함의 전통은 통일신라에 그대로 이어졌다.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는 내호와 외호를 갖춘 백제의 사리장치와 달리 화려한 가마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백제의 석탑을 통일신라가 받아들여 삼층석탑이라는 또 다른 전형으로 창조해간 것과 미술사적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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