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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생생한 감각 또는 교수들의 예언자적 역할
생명에 대한 생생한 감각 또는 교수들의 예언자적 역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9.13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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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114호가 던지는 목소리

격월간 <녹색평론>이 창간된 것은 1991년 10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근 20년 전인 셈이다. 네 명의 대통령이 이 잡지의 역사 밖에 서 있고, 이름을 표방한 정부만 해도 지금이 벌써 네 번째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적 대안 지평을 모색하면서 출발한 이 잡지가 집요하게 대면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현실의 문제들은 얼마나 해소됐을까. 불행하게도 이 문제들은 히드라처럼 머리가 잘려나간 자리에 다시 새로운 생살을 덧입히면서 더욱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녹생평론>이 더 견고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녹색평론> 114호에는 ‘고민’하면서 읽어야 할 내용들이 빽빽하다. 김종철 발행인의 글 「大地로 회귀하는 문학」은 근래 그 어떤 평문보다 빼어나고, 깊이가 웅숭한 글임에 틀림없다.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의 소설 『슬픈 미나마타』(원제는 『苦海淨土』)를 통해 ‘근대의 논리를 넘어가는 진정으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상황”에서 바로 이 소설 『슬픈 미나마타』에서 ‘중요한 암시’를,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수의학)의 「국가와 과학」, 농부 천규석의 「‘울고 넘는 박달재’의 진짜 비극」, 나이젤 비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신학·윤리학)의 「대학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등은 시사성이나 사고의 깊이 면에서 값진 글이다. 특히 나이젤 비거의 글은 <Standpoint>(2010년7~8월호)에 수록된 평문으로, 시장논리가 틈입한 한국 대학에 대학의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금 환기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과「대학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의 주요 부분을  발췌해본다.

■ 김종철,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  언젠가 평론가 와타나베는 작가생활 초기에 이시무레의 집을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한쪽 골방에 다다미 반장 정도의 공간에 책을 쌓아둔 채, 그 옆에 조그마한 밥상을 하나 놓고 쭈그려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창문이 있기는 한데, 워낙 비좁은 공간에 책과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다 보니 대낮인데도 깜깜한 방이었다. 식구들하고 격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그 어둠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 공간에서 이시무레는 신들린 듯이 글 쓰는 일에 열중해 있었다. 한사람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그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크나큰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불행한 의식’ 때문이다.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다. 쓸 이유가 없다. 요즘 우리 주변에 늙어서까지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지만, 글이라고 발표되는 것을 봐도 다들 편하고, 한가로운 얘기들이다. 절실한 얘기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문학이 아니다. 예전에는 고생들 했지만, 이제는 이만큼 살게 됐노라고, 다들 편하게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4대강이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이른바 문단의 대가라는 분들이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봐라. 절망적인 기분이 없다는 증거다.

아무튼, 이시무레에게 있어서 ‘불행한 의식’은 어렸을 적부터 싹트고 자랐던 것 같다. 정신이든 육체든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과 애정, 이런 게 할머니와 같이 고통스럽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소녀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미나마타의 희생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시무레는 환자들의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면서 의식이 굉장히 날카로워진다. 괴로움이 깊을수록 의식은 극한적인 한계까지 가닿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극한에서 오히려 사람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명감각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한사람의 작가이자, 무당으로서 이시무레가 자신의 작중인물들을 대변해서 전하고자 한 것은 결국 이 생명감각, 생의 근원적인 행복과 풍요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생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 나이젤 비거(Nigel Biggar), 「대학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예술과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가령 2009년 옥스퍼드에서 심사한 인문학 박사논문 중에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로마에서 그려진 풍경화의 기능과 위치에 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명성을 가지고 놀다―바이런과 그의 여성독자들」이라는 제목의 논문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이런 주제가 흥미로울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을 연구하는 데 공적 자금이 사용돼야 하는가. 가령,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군대를 위해 헬리콥터를 더 사는 데 쓰지 않고 거기에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설사 이 질문에 확고한 답이 있다 해도 그것은 손에 쥘 수 있게 눈앞에 있지 않다. 이 점은 지난 브라운 정권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공리주의적인 충격요법을 썼을 때 ‘예술―인문학 위원회’가 거의 쥐어짜다시피 해서 내놓은 답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답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도, 6년 전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찰스 클라크가 그 자신 수학과 경제학 전공자였으면서도 ‘분명한 유용성’을 지닌 학술적 주제에만 공적 자금이 지원돼야 한다고 당당하게 표명한 이유였을 것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적 사치를 위해 공부하는 중세주의자들이 있거나 말거나 간에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가가 그들을 위해 돈을 지불할 이유는 없습니다.”(그는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나중에 부인했다) 또한 그것은 2009년 6월 만델슨 경이 대학문제를 새로운 ‘경영개혁기술부’를 설치해 거기에 맡겨야 한다고 했을 때 아무런 사회적인 저항이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운 연립정부의 프로그램에서 오로지 “강력하고 개혁적인 경제를 형성하고” 산업과 보다 강한 연계를 맺는 것과 관련해서만 대학을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대학―과학부’의 새 장관인 데이비드 윌레트가 고등교육에 대한 ‘음울한’ 공리주의적 관점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그것의 사회적·시민적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리시대와 같이 과도하게 공리주의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학술활동을 강력하게 내세우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일하는 ‘교수들’(전문적인 학술활동을 한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교수들)의 도덕적 소명에 속한다. 오늘날 그들이 해야 하는 예언자적인 역할은 경제에 기여하는 것 말고 역사와 문학, 종교와 문화, 신학과 철학, 음악과 연극을 연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공부는 단순히 사소하고(trivial) 쓸모없는(otiose)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런 공부는 공공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서 자아도취적인 여가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런 공부는 인간적이고 공적인 번영을 위해 중요한가.
진리에의 헌신, 겸손, 가르침을 받을 자세를 갖춤, 인내, 주의깊음, 자비심 ― 이러한 미덕은 예술과 인문학이 가르치는 지적 훈련 속에 들어있다. 이러한 미덕은 미디어든 국회든 어디서든 공적 담론에서는 아무리 지나쳐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미덕이 없을 때, ‘지식 사회’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지혜로운 사회’가 될 수는 없다. 지혜롭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오만하고, 가르쳐도 듣지 않고, 참을성도 없고, 무자비한 공적 결정은 나쁜 결정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재능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적 역할을 찾을 수 있게 하며, 법률업무와 공공행정에 종사할 자격 있는 후보자를 만들어내고, 하이테크, 서비스 중심 경제에 배치할 노동력을 훈련시키며, 기술 또는 상업적 적용을 통해 새로운 과학지식을 탄생시키는 것, 이 모든 것들 외에 대학은 개인들과 시민들에게 특정한 덕성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덕성은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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