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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동아시아 비평사의 매혹으로 돌아오다
‘이덕무’, 동아시아 비평사의 매혹으로 돌아오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9.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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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鐘北小選』·『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학계가 인정하는 고전문학 전공자다.  ‘저자 인터뷰’를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그는 결국 거절했다.  “학자는 늘 업적 뒤에 숨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이미 몇 권의 문제작을 출간해 학문적 동료들의 질투 아닌 질투를 사기도 했다. 올해 초 『저항과 아만』(돌베개)을 내놓았던 박 교수는 최근 잇달아 『종북소선-이덕무 評選』(박희병 외 역주, 돌베개, 이하 『종북소선』)과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돌베개, 이하 『대화』)를 출간했다.

 
『종북소선』. 이 특이한 이름의 책이란 무엇인가. 蟬橘堂 李德懋(1741~1793)의 비평서다. 더 정확하게는 연암 박지원의 奇文 10편을 뽑아 거기에 이덕무가 자신의 평을 곁들여 엮은 책이다.
‘鐘北’이란 ‘종각의 북쪽’을 의미한다. 그러니 ‘小選’이란 글자 그대로 ‘작은 선집’을 말할 터. 실학파의 색깔이 묻어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박 교수는 이러한 양식이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評選書’로 불렸으며, ‘하나의 독자적인 저술’로 간주됐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간 박지원의 自撰 산문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오류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엮은 『연암집』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박영철본 『연암본』에까지 답습됐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종북소선』에 실린 박지원의 글들은 대체로 『孔雀館集』에 들어 있던 것들로 추정된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설명을 붙였다. “이덕무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비평에 큰 흥미를 보였는데, 서른 살 전후 무렵 자신이 읽은 박지원의 글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한 편 한 편 평점을 붙이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를 모은 것이 바로 『종북소선』이다.” 박 교수가 강조하는 ‘評點’은 ‘評語’와 ‘圈點’을 말한다. ‘평어’는 논평한 말이며, ‘권점’은 “중요하거나 잘된 구절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점을 찍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평점’이란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의 지평에서 볼 때, 일종의 비평행위였던 셈이다.

박 교수는 ‘사제 간이자 벗 사이’였던 박지원과 이덕무가 비평행위로 서로 얽혀 있다는 것, 이덕무의 비평적 요체는 바로 ‘평점’에 쏠려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결과가 『대화』에 고스란히 집적돼 있다. 이 때문에 이 두 책은 박 교수의 말대로 ‘둘이면서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이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것은 비단 이 두 책만이 아니다. 당대의 문장가 박지원을 흠모하던 선귤당 이덕무의 안목 역시 하나로 겹쳐진다. 박 교수는 그의 ‘연구실 학우’들과 4년 전 매주 강독하며 譯註 작업을 진행했다. 역시 또 하나의 ‘둘이면서 하나’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박 교수는 어째서 이 『종북소선』에 눈을 깊이 맞추었던 것일까. 이덕무의 비평 행위, 그의 안목이란 결국 ‘산문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해준다. 박 교수는 이 부분이 “여태껏 연구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 이덕무는 『종북소선』과 『대화』를 거치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덕무는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였다. 미학적 깊이와 통찰력, 정신적 높이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덕무의 가장 이덕무다운 점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비평가로서의 면모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조의 명을 받들어 박제가, 백동수 등과 군사교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던 이덕무가 박희병 교수의 ‘호명’으로 동아시아 비평사의 새로운 비평적 창안으로 살아났다.

이 순간, 고전문학 연구자로서의 박 교수의 남다른 욕망도 한껏 엿보인다. 객관성에 특권을 부여하고 신비화한 ‘근대비평’의 폐색성을 넘어서 작가와 비평가 간의 ‘정신적 대화와 교감’에 주목한 전근대 동아시아 비평의 가능성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덕무는 작가와 비평가 간의 ‘대화적 관계’를 극대화하면서 동아시아의 비평사적 創案에 해당한다고 할 아주 독특한 비평 형식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고 그는 평가한다. 그가 『대화』의 부제를 ‘『종북소선』의 평점비평 연구’라고 붙였던 이유다.

전근대 동아시아 비평의 우람하고 매혹적인 장면, 그리고 작가와 비평가 간의 대화적 관계가 강조된 ‘평점비평’의 낯설지만 활력 있는 모습은 한국문학의 넉넉한 유산일 것이다. 그 유산의 실체를 밝혀낸 박 교수의 노력에 학계의 환대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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