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3:50 (토)
[대학정론] 희망의 눈빛
[대학정론] 희망의 눈빛
  • 논설위원
  • 승인 2002.05.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5-14 17:54:10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달력을 보라. 5월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그리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君師父一體라고 해서 어버이와 스승, 군왕을 일체로 여기던 전통사회의 근간은 해체됐지만, 아직까지 강력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버이와 스승이 하나라는 생각인 듯하다.

이 생각을 따라가보면, 학교와 가정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거대한 질서를 보게 된다. 너무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아의 눈뜸과 내면적 성숙을 중요한 척도로 여기는 우리네 정서에서 본다면 어버이와 스승은 하나라는 거대한 질서는 마치 어떤 거대한 뿌리처럼 우람해보이기도 한다.

육체적인 탄생에 어버이가 깊게 개입돼 있다면, 교양을 갖춘 성숙한 사회적 인간의 탄생에는 스승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지 않을까. 도대체 산업화 이후 사회, 컴퓨터와 네트워크, 시뮬레이션을 통해 知를 습득해가는 탈근대사회에서 스승이란 무엇일까. 이런 시대에 스승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리오타르라는 프랑스의 사상가가 ‘탈근대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지식의 접근과 활용 문제를 중요하게 지적한 대목이 기억난다. 이제 더이상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지 않고, 다만 지식으로 가는 ‘루트’를 안내하는 정보의 셀파 역할에 그칠 것인가. 만약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컴퓨터의 네트워크에 기반한 정보화사회라면, 전통사회의 덕목으로 우리들 교수들에게 따라붙던 ‘스승’의 의미는 아무래도 많이 변질된 듯하다.

세계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원하는 정보를 원하는 시간에 손에 넣을 수 있는 동시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교수들에게 많은 규율과 덕목을 요구하고 있다. 교수들 스스로가 가장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그런 시대의 무의식적 요구가 내면화돼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관료나 기업, 언론집단에서도 교수 사회의 도덕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스승됨의 최대 관건은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냐에 달려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도덕성만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교수들은 여전히 연구업적평가 관리 대상이며, 학생들로부터는 강의평가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교수들은 일종의 수퍼맨 신드롬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강박증이 아닐 수 없다. 연구 잘 해야 하고, 강의도 잘 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모범적이며 근엄한 가장이 돼야 한다.

사회는 어느덧 정보화시대라는 신대륙에 도달했건만, ‘스승’이라는 말 속에는 정보나 지식이 아닌, 인간적 성숙의 개념이 내포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아우라가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구나 교사가 되지만, 결코 아무나 스승이 되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자의식, 자신을 향한 물음을 던질 때만이 우리는 ‘스승’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5월이지만 강단의 풍경에는 우울한 그림자가 너무 많다. 추문이 온통 휘감고 있다. 혹시 우리 스스로가 ‘스승됨’을 포기하고, 그저 지나가는 지식과 정보의 안내자로만 安存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