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樣式에 반영된 제국의 운명 … 일제,‘무덤’마저 식민지 이데올로기 도구로 이용
樣式에 반영된 제국의 운명 … 일제,‘무덤’마저 식민지 이데올로기 도구로 이용
  • 교수신문
  • 승인 2010.09.0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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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릉’, 비운의 역사를 말하다

조선 왕릉은 500여 년간 일관되게 같은 형식으로 조성됐으면서도 40기의 능은 서로 다르다. 바로 그 다름이 조성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선입견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훌륭한 만큼 능 석물도 훌륭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때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현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는 장대하고 조형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석물들이 놓여 있는데, 이곳에 이 석물들이 진열된 이유는 장대하고 조형적으로 근사한 석물이 발굴됐을 때, 당연히 세종대왕 능의 석물일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능 석물이었음에도 말이다. 1970년대 초에 잘못된 귀속은 최근까지도 조선시대 왕릉 연구를 뒤틀게 만들고 있다. 조선 왕릉의 석물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거스름 없이 흘러갔고, 그 흐름에 벗어난 경우는 석물의 귀속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석물 조성 당시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다. 

고종 홍릉의 무석인(왼쪽)과 순종 유릉의 무석인(오른쪽). 두 석물의 인물표정은 구체성만큼이나 제작자의 의도가 깊게 반영돼 있는 것으로 읽힌다.


조선왕릉 흐름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에서 일어났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두 기의 황제릉은 매우 독특한 구조로 조성돼 있다. 봉분이 조성된 능침공간은 조선의 전통적인 방식을 계승했지만 홍살문에서 침전까지의 神道(神路라고도 부름) 공간에는 석물들이 도열하듯이 늘어서 있다. 석물의 종류도 조선 왕릉에 어김없이 세워졌던 호랑이나 양은 없고, 그 대신에 기린, 사자, 해태, 코끼리, 낙타가 등장했다. 이는 중국 황제릉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황제국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릉-고종 말년의 시대상황 그대로

순종 유릉의 석물 해태상은, 일본 예술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표현의 입체성을 살려내고 있다. 고종 홍릉의 석물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 구체성은, 일본의 예술이 우수하다는 것을 민족적 차별기표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내면화한다(그림 위 순종 유릉의 해태상). 그림 아래는 홍릉 신도의 한쪽에 서 있는 석물들이다.
사진제공= 소와당
고종 홍릉은 壽陵(陵主 생전에 조성된 능)으로 조성된 능이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 1897년에 영선사를 중국에 파견해 명 황제릉을 답사하도록 했고, 이를 토대로 1900년에 황제릉 조성을 단행했다.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 홍릉을 금곡으로 천봉해, 고종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힐 계획이었다. 고종은 중국 황제릉 제도를 도입하되 규모를 대폭 축소해 당시의 형편에 맞는 황제릉으로 꾸몄다. 담장을 둘러 능역을 표시했고, 봉분과 직접 관계되는 병풍석,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을 제외한 호위적인 성격이 있는 문무석인과 석마, 그리고 석수를 신도로 옮겼다. 신도만 명 황제릉 형식을 도입한 것이다. 홍릉에 정자각 대신에 일자형 침전이 세워진 것은 중국 황제릉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실제는 고종이 명성황후와 며느리 순명황후에 대한 애틋함으로, 閣보다 격이 높은 생전의 殿으로 꾸며서 제례공간을 확장시킨 것임을 당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곡 홍릉은 이렇듯 장대함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생경하기조차 한데, 바로 침전 앞 신도에 배열된 석물 때문이다. 석인상의 인체비례는 물론 석수의 세부 표현의 미숙함은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이 석물들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금곡에 홍릉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1900년인데 실제 이 석물들이 세워진 것은 1919년이니까,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록문서들이 흐지부지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라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을 능 조성관련 문서가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종 홍릉에 가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황제는 정치적, 경제적 힘이 없었음은 물론, 제대로 기술을 갖춘 장인조차도 사라진 시점에서 굳이 “역대의 능전보다 규모의 광대함이 실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황제릉을 조성한 것은 고종의 마지막 사투에 가깝다. 홍릉의 조성과정, 능의 구조, 석물의 종류나 미숙한 조각표현조차 고종 말년의 시대상황을 오롯이 담고 있다.

1926년에 조성된 순종 유릉은 고종 홍릉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신도석물은 한눈에 비교된다. 유릉 석물은 인물상이나 동물상 모두 사실성과 입체적인 근육 표현에서 홍릉 석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유릉은 홍릉이 조성된 지 7년 후에 만든 것인데, 어떻게 이토록 다른 양식의 석물이 나타 날 수 있었을까. 일본인 조각가들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아이바 히코지로라는 동경미술학교를 나온 일본인 조각가가 모형을 만들고 제작을 지휘해, 석고모형을 화강암으로 옮기는 과정(이전에는 화강암에 직접 밑그림을 그리고 돌을 다듬었다)으로 완성된 것이다. 보통 3~5개월이면 완성될 석물을 무려 1년 반이나 걸려 제작했다. 순종의 모든 장례의식을 주도했던 일제는 일본인 조각가들에게 석물을 맡긴 것이다. 사실 당시 이왕직에는 돈이 없어 장례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능상석물인 병풍석, 혼유석, 망주석 등은 명성황후 청량리 홍릉에 사용되던 석물과 순명황후의 무덤(유강원)의 석물을 옮겨다 써야할 형편이었고, 현재 유릉의 침전과 비각은 유강원에 세워져 있던 건물을 옮겨 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신도의 석물만을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제작했다.

유릉-일제의 제작 의도는?

순종이 숨을 거둘 당시에는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당해 ‘李王’으로 강등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순종의 능을 고종의 능과 똑같은 형식의 황제릉으로 조성했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뒤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위해 황제릉을 조성한 것은 일제가 한국인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즉 ‘황실을 보호한다’는 한일병합조약의 명분을 살리는 동시에, 시기적으로 항일 분위기가 고조된 시기였던 만큼 황실과 한국의 백성을 회유하려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인 조각가를 동원해서 유릉의 신도석물을 공들여 조성한 것은 바로 옆에 있는 홍릉의 석물과 한눈에 비교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제는 조선 왕릉 석물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릉의 석물을 ‘石佛’이라고 부르거나 유릉의 석물을 “별 의미가 없는”이라고 설명하면서도 “大正 昭和의 예술을 永恒히 기념하기 위해서 아이바 히코지로에게 모형제작과 조각 감독을 맡겼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한 신문기사에서 일제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제가 홍릉의 석물이 훌륭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예술품이 영 쇠멸하고 말았고, 유릉의 석물에서 증명되듯이 일본의 예술이 앞섰으며 일본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선전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전통 조선 왕릉과 사뭇 다르게 조성된 두 기의 황제릉은 지나치게 중국 황제릉을 따른 것처럼 보이고, 또한 나라는 풍전등화의 상태임에도 능 조성에 공을 들인 고종의 태도와 홍릉 석물의 조각양식의 생경함 등으로 인하여 ‘미운 오리새끼’처럼 취급받았다. 그러나 이 황제릉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상황이 담겨 있다. 일제의 침탈 앞에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던 국가 현실, 일제가 조선 국왕의 무덤까지도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키려는 도구로 활용했던 상황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김이순 홍익대 미술대학원·미술사학

홍익대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시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저서로는 『대한제국 황제릉』등이 있다. 근현대조각과, 전통조각 중 능묘조각에 깊은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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